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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https://youtu.be/wHjLDaH7tME


마태복음 13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다른 한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는 천국에 대한 비유인데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비유를 해석해주는 열쇠를 제공하는데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천국은 사람과 같은데 어떤 사람인가 하면 자기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심은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그가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이 이 비유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다음 내용을 보면 자신의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결실할 때에 곡식 가운데 가라지가 보였습니다. 그러자 집 주인의 종들이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시는가 라고 묻습니다.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 수 있기에 그냥 추수 때까지 내버려 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추수 때에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자신의 곡간에 넣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핵심적 내용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37-3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 후에 제자들이 이 비유에 대하여 설명해 달라고 하시자 이 비유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니다. 이러한 설명 후에 이제 주님은 핵심을 말씀하시는데 40절을 보면 그런즉 이란 단어는 앞의 내용을 이어 받은 접속사로 그러므로 라고 번역됩니다. 가리지는 악한 자의 아들이기 때문에 추수 때에 즉 세상 끝날에 이와 같은 일이 있는데 가라지 처럼 거두어 불에 사르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이 비유의 내용은 끝 날에 있을 일들에 관한 것이며, 가라지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일들이 세상 끝 날에 있게 될 것인데 41-42절을 보면 인자가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며,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비유의 해석에 결정적인 힌트를 주는 단어가 나오는데 바로 그 나라에서 라는 단어는 뜻은 주님의 나라 즉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곳에서 라는 의미가 됩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하면 앞서 주님께서 이 비유를 해석할 때에 밭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해석적 다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밭은 세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세상이란 말 그대로 온 세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또 다른 해석은 세상은 온 세상이 아니라 교회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왜 중요한가 하면, 이 비유의 목적의 심각성과 이해됨이 더 강하거나 덜 강하게 다가 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속에서 40절에서 세상 끝날에 가라지가 불살라 지는 것과 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시며, 동시에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풀무 불에 던져 넣는다고 합니다. 즉 세상 마지막 날에 가라지의 운명과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운명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이에 더하여 마태복음 1343절을 보면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되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서 의인들의 운명을 언급하시며,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정리하면 주님은 마지막 날에 있을 악한자의 운명과 의인의 운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귀 있는 자 즉 이러한 비유를 깨달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자는 악인입니까? 아니면 의인입니까? 우리가 확신하기는 의인만이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 비유는 의인에게 주시는 비유입니다. 이 의인은 비유 속에서 좋은 씨이며, 천국의 아들들입니다. 왜 이들에게 이 비유가 필요한 것일까요? 이 비유의 주인공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입니다. 왜 의인들은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리는 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해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귀 있는 의인들은 들으라 너희는 자기 아버지의 나에게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것이다 라는 확신이 필요하며, 그 결과에 대한 소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 입니까? 왜냐하면 주님의 밭에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밭을 세상으로 이해하면 강도가 약해집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밭을 교회로 해석하게 되면 강도가 세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교회에 가라지가 있을 수 있는가? 왜 주님은 자신의 교회에 엉뚱한 가라지가 자라고 있어 교회를 망치고 있는데 내버려 두시는가 하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 답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보다 더 타락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교회에 대하여 불평하는 것이 거짓은 아닙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는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장애물이라는 뜻이지만 이 단어의 사용처를 보면 연약한 자들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실족하게 하며,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우습게 여기고, 법을 어기며, 멸시하며, 진리를 거스르며 무시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대하여 실망하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 답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서 교회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구나, 더 이상 주님께서는 교회를 돌보시지 않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사람이 자기가 심지 않은 마귀가 심은 가라지를 보고도 가만히 계시는 것은 천국의 아들들이 다칠까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을까봐 그렇습니다. 즉 구원을 얻은 신자들을 위하여 주님은 추수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들이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주님은 단호하게 아니라 그냥 두어라 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명령이 가능한 이유는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지키시며, 보호하시는 일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계시며,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여기에 성부하나님의 뜻은 주님에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반드시 그렇게 하십니다. 실제로 주님은 자신이 유다의 배신으로 잡혀 가실 때에 제자들을 보내어 달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요한복음 18: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18: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주신 자 주에서 하나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반드시 그렇게 하실 분이며, 그럴 수 있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있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불법한 자들이 있는 교회에서 어떻게 보호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 복음 103-4절을 보면 [ 10:3-4]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여기서 문지가 그를 위하여 문을 여는데 그는 바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때에 양은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우리에서 내 놓습니다. 그리고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양들의 이름 각각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또한 양은 그분의 음성만을 압니다. 다음 구절에서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따르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천국의 아들들은 모든 넘어짐과 불법하는 자들이 있는 교회에서 어떻게 넘어져 신앙을 저버리지 않으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따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이 주님의 음성이며, 가르침인지를 알 수 있는 분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인도와 천국의 아들된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는 마지막 날까지 하나도 잃어버림바 되지 않는 상태로 존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자신의 교회에 대하여 불평하며, 원망하며, 분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아내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목적도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하여 마지막 날에 구원의 보증으로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122절을 보면 [고후 1: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우리를 인치셔서 자신의 것이라고 소유권을 나타내실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어지러운 세상과 교회 안에서 어떻게 믿음을 유지하며, 신앙을 온전히 보전 할 수 있는가 하면 바로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며, 그 음성을 따라 살게 하시며, 그 음성에만 순종하게 하시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왜 낙심하지 말며, 불평하지 말며, 교회를 떠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며, 왜 여전히 인내하고 참고 견뎌야 하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야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마지막으로 살펴볼 내용은 지금은 아직 은혜의 때요 구원의 때이기 때문에 자신을 살펴 내가 지금 누구의 음성을 들으며, 누구를 따라가며, 내 영혼은 안전하며, 나는 주님의 생명을 소유했는가를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밭에 심겨져 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좋은 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천국의 아들들이 아닙니다. 천국의 아들들은 가라지와는 다른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분은 나의 안에 있기 위하여 날마다 그분을 바라보며 사는가 왜냐하면 그러할 때에 열매를 맺으며, 이 열매는 그분을 닮은 열매들이 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셨듯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하여 애를 쓰며, 주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셨듯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의 인격과 성품과 삶에 이러한 주님을 닮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항상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내 눈은 주님을 향하여 있는가? 내 마음을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을 원하고 있는가? 다른 무엇보다도 그분을 더욱 간절히 원하며, 갈망하는가? 나는 그분을 더욱 사랑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간 두 사람의 선자리가 그들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의 방향성과, 생각과 뜻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가 하는 것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알고 더욱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인데 히브리서 1026-27절을 보면 [ 10:26-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습니다. 여기서 짐짓 죄를 범한다는 말은 의도적으로 죄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악한 줄 알면서, 이렇게 하면 안되는 줄 알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 안에 머물고 있으면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죄에 의해서 속는 것이 언제든 회개할 수 있고, 언제든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그러나 다시 속죄하는 제가 없으며, 오직 기다리는 것은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 자여야 합니까? 심판을 기다리는 자여야 합니까? 맹렬한 불을 기다리는 자여야 합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 같이 빛날 것을 기다리는 자여야 합니까? 때가 오기전 회개함으로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더 늦기 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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