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누가 우리의 대속자였는가< 히브리서 2장 3절>

by YC posted Dec 2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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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상  https://youtu.be/C8VNZFSul7s


로마서 5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 그는 단순한 한 인간입니까? 만약 그가 한 인간에 불과하다면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대신 죽는 것으로 누군가의 죄를 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인간들 뿐만 아니라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나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자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전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두개의 증언하고 있는데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책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도 없고, 다른 피조물을 거기에서 구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4-5절을 보면 짐승인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합니다. 짐승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한 몸이란 일차적으로 인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지은 인간이 죗값을 치르기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 대신에 다른 피조물이 죗값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가 죄를 씻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다른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죄가 사해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누구든지 스스로 죄인인 사람으로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죄 값을 치를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타인이 나를 대신하여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18:4, 20절을 보면 이 두 구절이 말하는 내용은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는 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대신 죽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는 다는 것은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20절에서 범죄하는 영혼은 그가 죽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합니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첫째 우리의 대속자는 다른 피조물이나 다른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인간의 죄를 피조물이 대신 할 수 없으며, 다른 인간 또한 죄인이기 때문에 다른 이를 대신하여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은 죄에 대하여 반드시 인간에게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대속자는 반드시 인간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다른 조건이 붙는데 반드시 그는 죄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이지 다른 인간을 위하여 죽는 효력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없는 인간이 있다면 그가 우리의 중보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중보자는 단지 죄가 없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중보자의 자격 요건에는 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가 우리의 죄를 짊어 질 수 없는 이유는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그의 인성에 짊어 질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의 모든 삶을 비참하게 만들어 놓은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의 죄책만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그는 죄를 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를 소멸한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더 이상 죄가 지배하지 못하며, 죄의 노예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능력입니다. 구원이란 단순히 죄를 없이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죄에 대하여 지배를 받으며, 죄가 이끄는 대로 사는 것으로부터 자유하며 해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핵심입니다.

세번째로는 하이델베르크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우르시누스가 이렇게 말했는데 "우리의 중보자께서 그저 사람에 불과했고, 그런 상태로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스스로 짊어졌다면 그는 그 무게에 눌려 뭉개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절망 가운데 빠지거나 뭉개지지 않고 무한한 형벌을 감당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한한 힘을 소유한 분이셔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셔야 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왜 우리의 대속자가 반드시 인간이셔야만 하며 하나님이어야만 하는가 하면 그의 신성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그의 인성에 짊어지시며, 또한 의와 생명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돌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자신의 인성에 짊어질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시며 그 능력을 소유한 분이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속자가 되셔야만 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어렵고도 따분할 수도 있는 내용들을 살피며, 듣고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왜냐하면 히브리서 23절에서 이러한 것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등한히 라는 말은 무시하고, 태만히 하며, 멸시하는 태도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큰 구원에 대하여 가볍게 여기고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으며, 배우지 않는 태도는 결코 자신의 구원과 믿음에 유익을 줄 수 없으며 결국에 이런 태도로 일관하는 자들은 스스로 어리석음에 빠져, 보응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무관심한 자가 어찌 자신을 구원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설혹 말한다 해도 그것이 진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을 구원한 복음에 대하여 무지하면서 자신은 복음을 믿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은 자신이 믿는 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이지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되지, 무엇을 믿는 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말속에는 예수 그리스도 필요 없으며, 구원의 내용도 필요 없고 아무것이든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럼 불교는 어떻게 유교는 어떻고, 이슬람교는 어떻습니까? 믿기만 하면 된다면 말입니다. 도대체 이들은 왜 기독교인 된 것입니까? 믿음의 내용이 필요 없는데 말입니다. 이들의 말은 어느 종교로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는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종교는 같은 것이기에 어느 것을 믿든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길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그 보응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임을 기억하고, 당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분이 어떻게 당신의 대속자가 되셨는지를 깊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하신 일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만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왜 나의 삶을 그분께 드리는 것이 마땅할지, 내가 이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나온 행동이야 말로 참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