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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HFbSVcPg2n4



오늘은 성령으로 충만함에 대하여 성경을 통하여 그 의미가 무엇이며, 어떠한 것이 성령 충만함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성령 세례라는 말은 성경에서 표현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표현되고 있는 방식은 세례를 베풀다는 동사가 성령과 연관되어 쓰여지고 있는 총 7번의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다 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다 라고 표현되고 있는데 복음서에서 4번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2번과 고린도 전서 12 13절에서 한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들 모든 구절에서는 항상 헬라어 전치사 en이 사용되어 무엇과 함께 라고 번역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 13절을 보면 여기서 바울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종류의 세례는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로는 우선 세례를 베푸는 자와 둘째로는 세례를 받는 자 그리고 세번째는 무엇으로 즉 영어의 with in which 라는 요소가 있고, 마지막으로 세례가 행하여 지는 목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의 세례의 경우를 보면 세례의 주체는 요한이며 그 대상은 그의 제자들이요, 요소는 물이었고, 세례의 목적은 회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 13절의 경우에서나 다른 신약의 다른 곳에서 보게 되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세례의 대상은 모든 신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세례의 요소는 무엇인가 할 때 성령이 세례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대상자들로 하여금 한 몸을 이루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세례의 주체 즉 세례를 베푸시는 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신약의 다른 구절들에 나타난 성령의 세례에 관한 말씀들로부터 추정할 때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왜 우리가 살펴보는가 하면 성경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할 때에 종종 성령 세례라고 표현하는 말들 속에서 성령 세례가 중생 이후에 받는 또 다른 어떤 특정한 사건으로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성경에는 성령 세례라는 표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은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성령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다는 의미를 표현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중생하였다는 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생하지 않은 것이며, 거듭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 9절을 보면 바울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영은 성령을 가리키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즉 성령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가 중생할 때에 성령을 선물로 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하심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항상 성령께 온전히 복종하거나 항상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로마서 8 13절을 보면 성령이 우리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경고를 보면 육신대로 살려고 하는 경향성이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성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하나님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으며 이 일이 우리에게 가능한 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자연인 즉 중생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며,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인 것입니다. 결코 불신자들은 죄에로부터 육신으로부터 몸의 행실로부터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하여 육신으로부터 몸의 행실로부터 자유해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는 부분에서 영으로써 그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즉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복종함으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서 라는 표현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영으로서 라는 말은 나는 가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성령 하나님께 복종하며, 순종해야 하며,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내어 드릴 뿐만 아니라 생각을 그분께 내어 드리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기를 원하며, 그분의 뜻에 따르도록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며, 행동을 통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을 통하여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함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이란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가득 채우지는 문제에 관하여 신약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첫째로 성령의 충만은 한 사람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한 잠정적인 경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충만 또는 채우다 라는 동사는 헬라어 원문에서 부정시제로 사용되고 있는데 부정시제는 순간적인 동작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시제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사도행전 4 8절을 보면 이 말씀은 베드로가 발이 절어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친 후 산헤드린 앞에서 말한 내용으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내용은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베드로 위에 부여된 성령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령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담대하게 이 다리를 저는 자가 치료함을 받게 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이었다고 증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사도행전에는 이러한 특별한 형태의 성령의 충만을 말씀하고 있는데 바로 한 사람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한 잠정적 경험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성령의 충만은 동사 대신에 형용사가 주로 사용될 때에 표현되는 것으로 어떠한 형태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곤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4 1절을 보면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으로부터 돌아오셨을 때에 성령에 충만하더라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표현들은 열두 사도들에 의해서 선택을 받아 날마다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던 일곱명의 집사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경우나 또는 스데반이나 바나바에 대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절들을 종합해 볼 때에 알게 되는 것은 성령 충만이란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잠정적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애를 특징짓는 영구적인 특징들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채우다 또는 충만이란 또 다른 단어가 신약 성경에 두 군데 사용되고 있는데 이 경우 동사의 시제는 잠정적인 충만이 아니라 계속적인 충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이 경우가 바로 사도행전 13 52절 말씀으로 사도행전 13 52절을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의 시제는 미완료형으로 이 제자들이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두번째의 경우는 에베보서 5 18절로 에베소서 5 18절을 보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는데 이러한 표현이 나타나는 유일한 서신입니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동사는 현재인데 이는 우리가 마땅히 계속해서 성령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성령 충만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은 다음의 세 가지 형태의 경험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첫째는 신자들은 특별한 임무를 감당키 위하여 특별한 성령의 충만을 언제라도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목적은 그 임무를 행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관찰하면서 우리가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 모두는 마땅히 계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13 52절에서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하며, 에베소서 5 18절에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의 특별한 특징과 내용들이 있으며, 사람들이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성령이 충만함을 볼 수 있으며, 어떠한 것이 성령이 충만한 것이며, 어떠한 사람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가를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만약 그러한 것을 추구하며,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반대로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사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일반적인 오류는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이 과격한 감정적 표현을 하거나,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성실하거나, 신앙적인 표현이나, 고백을 하거나, 성경 말씀에 조애가 있으며, 박식하다는 것이 성령의 충만으로 여겨질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가르쳐왔고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활동에 활발이 참여하며, 봉사의 일에 열심을 가지며, 교회에 충성을 하는 모습이 성령 충만의 한 부분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시금석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특별한 은사나 능력이 나타난다고 해서 결코 성령이 충만한 증거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할 때에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더라고 할 때에 방언을 말하거나 또는 병고치는 은사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이 성령 충만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인가에 대하여 에베소서 5 19-21절을 보면 이 말씀들이 왜 중요한가 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라고 말씀한 후에 주어지는 내용들로 이 말씀들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할 때에 나타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들은 18절과 문맥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들인 것입니다.

        첫째로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서로에게 덕을 세우는 일을 하는 자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어 주께 드리는 일을 즐거워하는 내면적 성향을 가진 자입니다. 이 말은 노래를 좋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노래를 좋아해서 찬양 부르는 것을 즐겨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노래를 좋아해서 하는 것과 하나님을 즐거워해서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셋째는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감사를 드리는 자입니다.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무성의한 말의 표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마음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감사한 표현 뿐만 아니라 감사에 대한 보답의 행위를 이끌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며, 그분을 경외하며,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때마다 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삶이 예배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넷째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부터 나오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들을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종시키는 자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두 개로 종합하면 바로 예배와 교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찬양할 것이며, 우리의 아버지께 감사할 것이며, 서로에게 대해서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또한 신자들 간의 올바른 관계성 속에 놓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성령을 주셨는가를 생각해 보면 무엇이 성령 충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게 하며, 그분을 사랑하게 하며,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는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이란 주님이 성부 하나님을 섬기듯이 섬기며, 순종하며, 그분을 높이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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