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q87B_ackAmM
시편 37편 1절을 보면
이 구절에서 다윗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보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불평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시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평이라는 어휘를 살펴보면 조급해 하며, 초초해 하며, 안달이 나다 라는 뜻입니다. 문법적으로는 스스로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으며, 초초해 하며, 안달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초초하게 하고 안달하고 안절부절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잠언 24장 19절을
보면 여기에 사용된 분을 품지 말라는 단어가 시편 37편 1절에서
불평이라는 단어와 같은 하라 라는 동사입니다. 분을 품는데 누구에게 분을 품는가 하면 행악자들 곧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분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분을 품는 이유가 그들이 악을 행하기 때문 이라면 괜찮을
텐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분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이유는 분을 품는 이유가 악인의 형통함 때문입니다. 즉 악인이 잘되는 것을 보고 분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과 부유함과 성공을 볼 때에 초조함과 조급함을 느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은 시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기라는 어휘의 의미는 열열히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하는 잠깐의 목적 없는 공상속의 바램이 아니라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열열한 사모함이 마음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저버리게 만들 수 있는 위기라는
것입니다. 왜 배교의 일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번영을 누리며, 잘 사는 것을 볼 때에 자신을 비교해 본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문제의 핵심은 비교의식 입니다. 예레미야 12장 5절을
보면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라고 합니다. 여기에 비교가
있는데 보행자 즉 걸어 다니는 사람과 함께 달려도 피곤하다면 어떻게 능히 말과 함께 달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과 말이 비교의 대상이 되며, 내용은 달리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글 성경에 경주하겠느냐 라는 어휘가 바로 하라 라는 단어를 어근으로 하고 있는 단어 입니다. 불타오르다, 불붙다 라는 뜻으로 불평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왜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고 시기하게 되는가 하면 그래서 마음이
초조하게 되고 조급하게 되며, 안절부절하게 되는가 하면 바로 경주의 대상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하고, 믿음을
흔들리게 하며, 세속적이 되고자 하며, 세상에 것들을 추구하는
삶으로 빠지게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바라볼 때이며, 그들을 나의 경쟁자이자 나의
비교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삶과 그들이 행하는 것들과 그들이 얻고 누리는
것들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 내 자신이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잘 사는 사람들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고 그들과 같이 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73편 2절을 보면
한글 성경에는 없지만 원문에는 왜냐하면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1절의 이유로 주어지는 말씀으로 왜 불평하거나 시기하지 말아야 되는가 하면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악인들의 형통에 대하여 비유하고 있는 것이 둘 있는데 풀입니다. 그리고 푸른 채소 입니다. 이것들은 자라는 속도가 상당히 빠릅니다. 비만 오면 금새 자랍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풀은 아끼지 않고 속히
베임을 당하게 되며, 푸른 채소 같이 금새 쇠잔 즉 힘이 빠지며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고 자 하는 것은 이들은 곧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잘나 봤자
70년이나 80년 입니다.
아무리 성공해 보았자 그 꼴을 보는 것은 50년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성공한 자들은 30-50년 내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먹을 것을 주시고 마실 것을 주시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은 아까지 않고
모두다 베어 버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악인의 형통이 부럽지 않은 이유이며, 그들의 성공에 초조해 하지 말아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확실한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사야서 40장 6-8절을 보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외치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외치리이까 라고 묻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다고 합니다. 이것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운으로
그의 불어 풀이 마르게 하시며, 꽃이 시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영원한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서 있게 되며, 영원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깨달은 것이며,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의 비교 대상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이나, 세상에 살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비교의 대상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소유하며, 그분을 닮기 위해 경주하며, 그분을 위하여 초조하며, 조바심을 내며, 안절부절 못해야 하는 것입니다. 곧 오실 그분 앞에 내가 어떻게
설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조바심이며, 우리의 초조함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의 것에
대하여 조바심과 초조함과 안달해 하는 것을 우리는 부끄러워해 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우리가 벗어나고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시편 37편 3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우선 여호와를 의뢰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명령으로 여호와를 의뢰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의뢰하라는 단어는 신뢰하다, 믿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이 의미
속에는 행복감과 안도감을 얻는 다는 것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즉 악인이 형통함에 대하여 불평하지 말고
시기하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이 바로 너희에게 행복과 안도감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너희에게 행복과 안도감을 허락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에게만 그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라고 합니다. 악인의 삶을 뒤 쫓으며,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며, 추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행복함을 맛볼 때이며, 그분으로부터 안도감을 얻게 될 때 입니다. 이것은
그분을 신뢰함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지속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삶이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필요한 것은 땅에 머무는 동안에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그의 성실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 변함이
없으심, 그분의 우리를 향한 충성심을 우리의 먹을 거리로 삼아 지속적으로 그것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먹는 다는 행위를 사용하는 이유는 먹는 다는 것은 육체가 살아갈 힘을 얻는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을 것으로 신자의
살아갈 힘은 다른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성실하심과 충성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얼마나 충성되시며, 얼마나 신실하시며, 얼마나 성실하신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생각함으로 믿음으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먹는 것으로 믿음을 표현하셨는데 요한복음 6장 54-55절
주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합니다. 그러면 영생을 가지게 되면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며, 주님의
피는 참된 음료 라고 합니다. 여기서 먹고 마신다는 것은 믿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믿음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주님과
함께 연합을 이루게 되며, 주님의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아 먹어야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실을 우리가 매일 먹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굶주려 악인들의 부유함에 초조해지고, 조급해 질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를 본 받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배부르며,
평안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음식은 하나님의 성실입니다. 그분의 충성됨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행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족하지도 못하며,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풀이 속이 베임 같이 푸른 채소가 쉬이 쇠잔함 같이 될 것입니다. 부디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권면을 듣고 하나님의 성실을 먹고 마시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