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0fg2_03r8Zk
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까? 성경이 말씀하고 있고
또한 구원함을 얻은 우리가 알다시피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 지시고 우리의 죄의 값을 지불하시고 죽음을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루신 이러한 구원 사역을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술은 대단히 성경적이며, 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이 가지는 함정이 있는데 비인격적인
무감각한 방식으로 구원을 생각할 수 있다는 함정입니다. 비인격적 무감각의 고백이라는 의미는 마치 수학
공식을 암기하여 답을 맞추듯이 기계적으로 이러한 우리 주님의 구원 사역과 그에 대한 나의 믿음의 반응이 마치 구원을 받은 것으로 확신되어지게 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그러므로 자신의 죄책이 사해졌다고 할
때에 비인격적 무감각한 방식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면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소위 상업적인 속죄론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그분이 이루신 일에 관하여 그것을 얻는 방식에 있어서 비인격적인 무감각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즉 아무런 관계나 교제나 연관이 없이 단순히 믿는다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의 방식이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영적
그리고 실제적 연합 속에서 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1장
3절과 4절은 바울은 먼저 찬송하리로다 라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분명 이 말씀에서 우리가 찬송할 것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전제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입니다. 이 두 구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은 두 번 반복되게
사용되고 있는데 바로 뒤에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은 안에서 라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안에 있다는 말은 연합을 의미합니다. 즉 한 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 단순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사역 자체를 믿는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내가 함께 연합 된다는 의미가 바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의미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6장
5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다면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라고 합니다. 우리의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어야만 부활 또한 같은 모양으로 연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합이라는 것의 의미를 서로 각각의 사람들이 뜻과 생각과 마음이 하나로 같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합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한 몸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구절을 간과하는 이유는 연합이라는 의미가 단순히 마음에
믿음만으로 죽으심과 같이 죽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연합은 한 몸이며,
영적 결합인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고 주님이 존재하고 각각이 따로 존재하지만 마음이 함께
한다는 생각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연합이 아닙니다.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체 안에 함께 거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을 보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나와 그리스도는
단지 믿음에 의해서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시며, 나와 연합하여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이 연합 됨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과 그때에 나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 되어 그분의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책이 사함 받아 이제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방식으로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난 것이며, 영원히 죽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2장 4-5절을 보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허물로 죽은 즉 우리의
죄악 때문에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따로 살리신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즉 그분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의 부활하심이 자동적으로 생명의 연합된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 첫번째 부활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첫번째 부활은 이 세상에 살 동안에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이 그들의 허물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에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살아남은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단지 그것으로 내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방식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확실성은 내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의 부활을 보니 내가 부활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며, 이 후에 둘째 부활에 내가 참여하리라는
것을 내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믿음의 지식으로만 인정하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즉 영적으로 중생시에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짐으로
인하여 그분이 십자가에 죽음이 내가 그와 함께 그 안에서 내가 죽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나와
실제적인 연합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는 다는 것을 나와 그리스도를 분리해서 그분을 믿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다는 것은 내가 그분과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연합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며, 우리의 몸과 영혼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고안된 되고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에베소서 1장 3-4절을 보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합니다. 누가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바로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 작정하신 것입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즉흥적으로 지어낸 구원의 방식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세상이 지어지기 전에 이미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시기 위하여 세상이
지어지기 전에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 연합의 또 다른 특별함은 우리는 첫 사람 아담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 아담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관리하며 보존하는 직분을 맡은 특별한 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고, 하나님과 교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특별함은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와 연합된 관계 속에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롭고 놀라운
관계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의 하나가 아닌 하나님 자신과 연합으로 자신의 일부로 우리를 받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가족이 되었다는 의미가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가족이 그의 권속이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어떤 것이 복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것이
우리의 복이며,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신비이자 또한 구원에 대한 확신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