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zp5CfMZSUJ4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시편 2편 12절 말씀입니다. 이 시는 다윗의 시로 예언적 성격을 가진 시입니다. 누구에 대한 예언인가 하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신약에서 인용된 시이기도 합니다. 노골적으로 하나님과 우리 주님을 대적하는 인간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12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시편 2편 12절을
보면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고 합니다. 그의 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리킵니다. 입맞추다 라는 말은 당시의 의미로는 복종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우리가 가는 길에서 망하게 되던지를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급하다는 것입니다. 즉 갑작스럽고, 순식간에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모든 것이 평안한 것처럼 느껴지고 그렇게 평안이
지속될 것처럼 보일지라도 일순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구되고 있는 것이 여호와께
피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살길이며, 하나님의 급하신 진노를
피하는 길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급하신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참을성이
없으시구나 하나님은 인내하시지 못하시는 분이신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에게
입맞추지 않는 이들을 그들의 가는 길에서 망하게 하시는가? 왜 그렇게 하실 수 있는가? 어째서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여호와께 피하여야만 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부터는
왜 그래야만 하는지 왜 하나님의 진노는 정당한지 그리고 그분의 심판은 왜 공의로우신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부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22장 8-9절을 보면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로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 대한 비유의 내용입니다. 임금은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준비하였고 이미 초청장을 보내어 초청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청한 사람들이라는 표현
속에서 청한 이라는 단어는 칼레오 라는 헬라어오 부르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것이며, 거부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이 부름은 알고 지내는 사람의 초청도 아니고 친구들의
초청도 아닙니다. 왕의 부름이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왕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을 자신에게 부르신 것입니다.
이 왕은 갑자기 부른 것이 아닙니다. 이미 초청한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거절하였습니다. 왕의 부름에 거절한
자들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둘째로는 왕 되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마치 요나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것처럼 니느웨 성을 돌며 회개하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왕되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강권하는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 23절을 보면 이 비유는 앞선 마태복음의 비유와 같은 류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강권이라는
말은 강하게 권하는 뜻으로 필요로 하게 하며 오게 끔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분에 대하여 처음부터 호의를 가지고 믿어야지 해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인생의 굴곡 속에서 어떤 이는 인생의 헛됨을 깨달음을 통하여, 어떤 이는 이끌려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호소하시고 우리를 이끌어서 믿게 하시고 그분의 아들에게 입맞추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역하는
자는 마땅히 진노로 멸망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을 보면 성경에서는 주님께서 우시는 장면이 세 번 나오는데 첫째로는 나사로의 죽음에서 그리고 둘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히브리서 5장 7절에서 말씀하고 있으며, 셋째는 바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시는
장면입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고 한 일이 몇번이더냐 고 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모으려고 수 없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마땅한 것입니다. 지금도 어떻게 그렇게 하시냐고 묻는 다면 고린도후서 5장 20절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간청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권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통하여 권면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간청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고 여호와께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거역하고 대적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공의로우신 것입니다. 셋째로는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진노는 합당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을
보면 주의 약속이 어떤 이들은 더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계시며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아직도 재림하시지 않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는다 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너희를 향하여 오랜 마음의 상태로부터
혹은 오래 고통하다 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어 보이는 것은 주께서 자기의 약속을 잊어버렸거나
느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향하여 오래 고통하며 견디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멸망치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멸망도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은 지금도 여호와께 피하라고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를 향한 그분의 진노는 당연합니다. 계시록 22장
17절을 보면 이 구절에서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이라고 표현되었는데 이 말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 교회가 외치는 말은 오라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계시록이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이제 선택하며 이제 결정하여 이제 주님께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를 선택하며 누구를 위하여 살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어떤 자가 오라는 초청을 받습니까? 듣는
자입니다. 또한 그 듣는 자들 중에 반응하는 자는 목마른 자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자입니다. 이들이 오고자 하는 결정을 통하여 받게 될 것으로 기대되는 것은 값없이 주어지는 생명수
입니다. 이 초청은 불신자에게는 구원의 초청이 되며 신자에게는 더 깊은 은혜의 자리로 나아감에 대한
초청인 것입니다. 더 이상 영적 목마름에서 벗어나도록 생명수가 자신 안에서 넘쳐나 예수의 생명이 자신
안에 살아 넘치도록 하기 위한 초청인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대적하지 말고 오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그분께 피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피할 길을 주셨는데도 여전히 피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멸망 받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 입맞추고 하나님께 피한 우리들은 얼마나 복된 자들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분 안에 사는 우리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며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