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1 눅 10장 25절부터 37절

by YC posted Sep 1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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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3WOwBDOLvII


오늘 말씀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로 불리는 말씀입니다 이번에 이 본문을 보면서 새롭게 이해가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나누려 합니다. 먼저 이 비유는 율법사와 예수님과의 대화 가운데서 등장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025절을 보면 [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사가 일어나서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아마도 지금 상황이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율법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질문에는 질문자의 의도가 있습니다. 몰라서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고 또한 사람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율법사의 질문은 후자입니다. 떠보기 위한 질문입니다.

성경은 시험하기 위해 질문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율법사가 몰라서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생이라고 하는데 수준이 있는가 확인하려는 작업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악의적 질문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사람의 인격이란 격정의 한 순간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좋은 것 같다가 한 순간에 돌변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돈 문제에서 인격이 드러납니다. 식당에서 누가 내느냐에 또 누가 얼마나 더 내느냐에 목숨을 겁니다. 또 가벼운 논쟁 가운데 인격이 드러납니다. 의견 차이를 통하여 그 사람의 됨됨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갑작스런 상황에서도 전혀 휩쓸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우리를 골탕 먹이려는 악의적 질문에 대하여 발끈 하거나 화를 내면서 반격에 나섰을 것입니다. 율법사면서 질문 같은 것을 좀 해라 대 놓고 무시하거나 모욕감을 주었을 텐데 그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음절인 26절을 보면 [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께서는 다시 율법사의 질문에 재 질문 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여기에 우리는 성경에 대하는 중요한 가르침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먼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묻지 않고 있음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율법은 모세 오경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는가가 중요함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율법 즉 당시의 구약 성경에 관하여 많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성경을 많이 읽어 지식이 많기에 자신의 생각과 이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율법사의 많은 지식으로부터 얻어 진 영생을 얻는 지식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느냐에 대한 물음입니다. 성경 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알며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과학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에서 발견하는 것도 유명한 철학자의 철학에서 발견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경에서만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경험이나 학문적 깊이에서 나온 철학적 가르침에서는 살아가는데 유익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성경 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말씀을 얻게 하는 유일한 책임을 부인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율법사처럼 영생을 얻고 싶습니까? 성경을 읽으셔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53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사람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이 성경의 핵심을 말하는데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며, 그렇게 됨으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누가복음 1026절을 보면 [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의 질문 중에 또 다른 중요한 것은 네가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말은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중요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 통독 집회에 가보면 성경을 1주일 만에 일독하게 합니다. 이렇게 읽고 사람들이 감격해 하며 감동합니다. 무엇에 감격하는가 하면 예수 믿은 후 처음으로 이제야 일독을 했다는 감격입니다. 이 감격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아직도 일독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입니다. 그러나 성경 통독 수련회에서 1주일 동안 성경을 읽고 가슴에서 일어난 감격이 일독했다는 뭔가 나도 해냈다는 성취감에 취한 감동이라면 이것은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에 그랜드 캐년을 차로 그것도 라이트를 끄고 지나간 후에 사람들에게 나 그랜드 캐년을 갔다 왔어 라고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본 것이 없습니다. 느낀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내가 갔다 왔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감동이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사람들은 모두 자신도 모르게 세계관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계관이라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눈으로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이해 하는가를 결정하는 사고의 체계입니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다르게 해석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차를 선택하는 취향을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차를 선호합니다. 왜냐하면 작으니까 기름이 적게 들어 경제적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대형차를 선호합니다. 왜냐하면 사고 시에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기름값 아끼려고 생명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음식을 먹을 때도 맛이 좋아야 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이 아주 낡고 약간 더럽고 하더라도 맛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분위기와 서비스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맛도 좋지만 우선은 청결함과 좋은 분위기가 음식의 맛도 살려 준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람들의 이런 취향과 성향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입니다.

   로마서 102절을 보면 [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유대인들의 경우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그 열심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읽은 성경을 올바로 읽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지식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며, 오히려 성경의 기록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좌우 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일반적 세계관과 다른 세계관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을 기독교적 세계관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은 세상을 보며 이해하며 분석하는 것이 기독교 즉 성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는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이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진화론 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진화론을 과학이라고 말하는데 진화론은 과학이 아닙니다. 과학이 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과학은 동일하게 주어진 조건에서 반복하여 얻어낸 결과가 늘 같아야 과학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런데 진화론은 증명이 안됩니다. 동일한 조건에서 반복하여 얻어낸 결과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진화론을 과학으로 믿고 있습니다. 사실은 진화론은 과학이 아닌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증명되지도 않고 증명 될 수도 없음에도 사람들이 믿고 있고 믿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로 인하여 생겼음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이 그렇게 증언하고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계관이라는 것은 세상에 벌어지는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바른 성경 이해는 바른 성경적 세계관을 만들어 냅니다. 바른 성경적 세계관이 왜 중요한가 하면 여기서 우리의 삶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며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삶을 삽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주 이심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주신 분이시기에 우리를 위해 못하실 것이 없으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일 그분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게 하여 우리로 감사하게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분의 말로 할 수 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기에 더 이상 우리 안에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함을 압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나눔은 성경이 우리에게 베풀라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도 참고 인내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그것이 소망을 이루는 길임을 알게 하기에 그렇게 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삶이 바뀌게 됩니다. 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은 죠지 뮬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평생 15만명의 고아들을 돌보며 먹이고 길렀기 때문입니다. 고아원을 운영하며 세운 그의 철칙은 고아원을 운영하기 위한 재정을 얻기 위해 부자들에게 구걸하거나 정부에 손을 벌리거나 재정을 위한 다른 사업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고 또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 일을 하시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이신 하나님께 무릎을 꿇기 시작한 것입니다. 뮬러는 고아원을 운영하기 위하여 드는 비용을 손을 벌리지 않고 사람들을 의지 하지 않고 오직 기도를 통하여 공급받고자 했던 이유가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드러내길 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며 가지게 된 그의 세계관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기꺼이 일하시며 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랬기에 5만번이 넘는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믿으며 사는 그리스도인 입니다. 이것은 신자에게만 보이는 것이며, 믿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보이지 않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기에 이러한 생각을 할 수가 없는데 고린도전서 1519절을 보면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만일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가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이 끝이 아니며 영원한 삶이 있음을 믿고 있기에 불쌍하지도 않고 이러한 삶을 살지도 않는데 고린도전서 1532절을 보면 [고전 15: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라고 할 수 없으며 이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삶이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이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지를 알기 때문에 이렇게 못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