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도덕과 윤리와 믿음의 차이 창13장 8절과 9절

by YC posted Nov 0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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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XiuVMdvFwYI

우리는 종종 교회에 다니는 것을 정직한 사람의 표상으로 또는 착한 사람의 표상으로 여기기도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말이 사실이며, 또한 자신의 행동이 진실하다고 말하려고 할 때 그 확증으로 나 교회에 다녀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 집사입니다. 나 장로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나는 당신이 믿지 못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앞에서 자신의 정직함 올바름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나 집사야 나 장로야 나 권사야 나 목사야 하면서 부끄러운 짓을 한다는 것이 문제이고 어떻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그럴 수 있지 라는 말을 하게 만든다는데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그 사람의 도덕성이나 윤리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으며 순종하며 산다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따른 삶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를 더 착한 사람이나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사람들에게 융통성이고 포용력이 있으며, 남에 대한 이해와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모든 사람에 대하여 포용력을 가지며, 모든 사람을 이해하며, 인정하며, 옳다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악과 함께 할 수 없으며, 죄인과 동행하지 않으며, 죄에 타협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보고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 11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 즉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무한한 포용력과 이해와 자비와 사랑으로 악인들의 악을 옳다 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책망하며,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며, 불의에 대하여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들과 함께 할 수 없으며 오만한 자들과 함께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만 옳으시며, 하나님만 진실하시며, 하나님만 참이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것만 의롭다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들이 섬기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먼저 우리 주님을 세상이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이유는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으로 만 산다면 세상은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도덕과 윤리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 미워함에 대하여 알프레드 아들러의 철학처럼 미움을 받을 용기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갈라서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유는 그 둘이 부유하였기 때문인데 창세기 136절을 보면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때에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창세기 138-9절을 보면 여기서 아브람은 롯이 자신의 친족 즉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다투지 말자고 합니다. 그리고 네 앞에 온 땅이 있으니까 나를 떠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완전히 갈라서자는 의미입니다. 내가 반대 방향으로 가서 서로 침해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주목하게 되는 것은 롯에게 우선권을 주는 아브람입니다.

        이 이야기가 어떤 이들에게는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아브람이 삼촌인데 불구하고 조카에게 우선을 권을 준 아름다운 섬김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남을 먼저 배려하며 남을 존중하고 아낄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먼저 선택권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아름다운 아브람은 신자가 어떻게 세상에서 모범을 보이는가에 대한 예표이다. 아브람처럼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착한 마음의 소유자 아브람, 우리도 아브람처럼 착한 마음을 가지자 여기다 한 구절 더 붙여 형제가 오리를 가지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을 주라는 말씀까지 더합니다. 그리곤 이런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선한 마음 착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복음은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것이 신앙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것이요 도덕적인 것이지 신앙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예전에 청년들 간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한 믿음 좋다는 청년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자신은 한번도 술에 대한 유혹을 느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를 모르겠고 자신은 술 근처도 안 가며 술을 먹고 싶지도 먹어 본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술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청년들이 부러움과 역시 신앙이 좋은 사람은 다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후에 한 여자 청년이 말했습니다. 자신은 술을 먹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도 먹고 싶고 누가 먹는 것을 보아도 먹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술이 댕길 때가 많은데 자신은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시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참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청년 중에 여러분은 누가 더 신앙인 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대체로 신앙이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초월적인 상태가 신앙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남자 청년이 신앙이 좋은 줄 압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유혹을 느끼며 견뎌내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인줄 압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앞의 사람은 술에 대하여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안 합니다. 이것은 신앙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신앙이 없어도 술을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적 체질적인 문제이지 신앙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술을 마시지 않는 이유가 술 취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신앙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과 상관없이 하지 않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그렇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신앙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 더 덧붙여 말씀 드린다면 이 사람은 너무 착해서 예수 안 믿어도 천국에 가겠네 라는 말이 성립되겠습니까? 신앙의 차원에서는 성립이 안됩니다. 착하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윤리적이 되라 도덕적인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이 되라고 합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삶의 기준이며 이유인 사람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음이고 내가 하지 않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라는 고백이 신자의 고백입니다. 바른 믿음의 사람이 되니까 삶이 변하게 되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온전하여 지는 것이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살기 때문에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성경을 보면서 윤리적 도덕적 잣대를 대고 그래서 복을 받는 다는 둥 잘 된다는 둥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아브람도 착하고 의롭고 선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넒은 아량을 가져서 먼저 우선권을 조카 롯에게 주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치고 신앙을 요구합니다. 모든 성경은 신앙의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아브람의 선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가 어떻게 먼저 선택권을 조카에게 줄 수 있었는가 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창세기 127절을 보면 본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땅에 대한 약속을 처음 하신 장면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아브람이 한 반응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았다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아브람이 이 말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애굽에서 자신에게 약속하신 그분이 어떤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신지를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롯과의 사이에서 다툼이 일자 롯을 떠나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먼저 우선권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 본문을 좀더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보는 바 대로 롯은 삼촌의 말에 눈에 보기에 가장 좋은 땅을 선택해 떠납니다. 성경은 롯이 택한 땅이 어느 정도 좋은 땅이었는지 이렇게 표현합니다. 창세기 1310절을 보면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롯이 떠나고 아브람이 혼자 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314-15절을 보면 본문은 롯이 떠난 후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롯이 떠난 후에 혼자 남은 아브람을 찾아 오신 것일까요? 본문을 보면 아브람을 위로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더 확신을 심어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보라라고 합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미 이 약속을 127절에서 하셨는데 다시 하시는 것입니다. 왜 다시 반복하냐고요? 아브람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 127절 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아브람에게 이런 확신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선택권을 롯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이 일을 행하였다고 해서 이것이 쉬운 문제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아브람이 나를 떠나라고 롯에 말합니다. 이 단어는 해석하기가 어려운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의 이 단어는 명령형이면서 수동형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please separate from me 라고 번역합니다. 한국 말로 제발 나로부터 떠나줄래 라는 의미가 됩니다. 나를 떠나라 라는 것이 당당해 보이지만 그 의미는 제발 나를 떠나 줄래의 청원에 비슷한 의미입니다. 해석이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왜 이런 복잡함이 아브람의 마음에 있는가 하면 이 땅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땅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유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 땅에는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습니다. 거기다 지금 롯과 헤어지며 그 땅을 분배하는 느낌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나에게 주셨지만 나는 아무런 권한도 이 땅이 내 것이라고 주장도 못하는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고민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이 어떻게 이런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믿음으로 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9절을 보면 아브람은 믿음으로 현재는 자신의 땅이 아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이 땅은 자신과 자신의 후손에게 주실 것을 믿고 바랐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도 아브람과 같은 동일한 어려움을 경험합니다. 예수를 믿고 천국을 소유했습니다. 영원한 삶을 소유했으며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전능하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도우신다고 하십니다. 너를 떠나지 않으며 너의 필요를 채우신다고 하십니다. 이런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신자는 여전히 세상에서 연약한 존재로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그날에 우리는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될 것이며 이 땅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 거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신자는 여전히 가난하고 헐벗으며 고난 가운데 어려움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 영광스러운 자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의 고민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셔야 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며 사셔야 합니다.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아브람이 롯과의 헤어짐과 선택권을 먼저 준 것이 믿음의 차원이라는 것은 창세기 1317-18절 말씀이 더욱 증명합니다. 이 말씀이 그냥 장소를 옮긴 사건이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에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그래서 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그래서 아브람이 헤브론으로 장막을 옮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어나 종으로 횡으로 걸어보라고 합니다. 그 땅을 주리라 약속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그 약속을 믿고 그 땅의 종으로 내려옵니다. 헤브론으로 말입니다.

        신자는 도덕에 근거해서 윤리에 근거해서 살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삽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라고 요구하지 착하게 살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이 착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 믿음인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착해도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윤리적으로 완전하다 해도 예수와 아무 상관없으면 신자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16절을 보면 신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에 근거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자는 오직 신앙에 근거해서 행동하고 신앙에 근거해서 멈춥니다. 신앙의 나의 삶의 표준이요 근거라는 것입니다. 봉사하는 것도 그냥 착하고 본래적 순종의 마음이 있어서 하는 것은 그냥 봉사이지 믿음에서 난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내가 봉사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순종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이기에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남을 돕는 행위도 본래적 선한 마음에서 하는 행위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착함이라면 신앙이 아닙니다. 그냥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뿐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에 빠져 신앙이 이것들로 채워진 삶을 삽니다. 신앙과 도덕적 윤리적 삶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또한 신자는 현재를 살지만 미래를 위해 사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