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아닌 이유 요한 복음 3장 3절

by YC posted Nov 1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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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iTW0SnDth6U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자연인으로서의 인간 즉 타락하여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고 위하여 살 수 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이며, 그것이 누군가에게 일어난 사건이라면 그에게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크고 놀라운 사건이 그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성경이 그렇게 증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을 살펴보면 첫째로 신약 성경에서 사용되는 생명 혹은 삶이라고 번역 되어진 단어 중에 비교가 되는 두 개의 단어를 보게 되는데 하나는 비오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단어는 조에 라는 단어입니다. 먼저 비오스라는 단어를 보면 베드로전서 42절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베드로는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육체의 남은 때를 살다 라는 표현에서 살다 라는 것 즉 삶이라는 단어가 비오스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용례를 보면 비오스는 일반적으로 각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좀더 설명하자면 생물학적인 생명으로 음식, 공기, 물 등과 같은 것에 의해 유지되나 마침내는 죽음으로 끝나는 유의 생명을 말합니다. 반면에 조에 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5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할 때에 생명이 조에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비오스와는 전혀 다른 의미인데 문맥에서도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않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생명으로 영적인 생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말하는 것으로 이 생명은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삶입니다. 또한 이 두 삶은 동일한 생명 즉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 같지만 전혀 다른 반대적 의미를 가지는데 비오스는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반면에 조에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향한 생명이라는 의미에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생명 혹은 삶이라는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아니며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사는 자가 아니라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사는 자이며, 이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하여 사는 삶이라는 의미에서 반대가 되는 것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는 다면 그는 이러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이며, 이러한 삶을 사는 자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삶 즉 조에의 삶은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며, 값없이 주신 선물이기에 그러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생명은 비오스 입니다. 즉 생물학적 생명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적 삶을 사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을 비오스의 삶의 살기 위해서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신만을 위하여 살게 하시기 위하여 비오스를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타락 후에 인간은 이기적으로 변했으며,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하며 생각하는 경향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죄로 인한 타락의 결과였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조에의 생명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고 다른 이들을 향하여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이것이 오염되었고 부패하여 인간은 조에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비오스의 생명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썩어 죽어질 비오스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될 인간들을 구원하여 다시 그들에게 조에의 생명으로 부르심으로 그들로 조에의 삶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내용을 증언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14절입니다. 요한복음 14절을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하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 안에 생명은 조에 입니다. 이 조에는 사람들의 빛으로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는 생명의 빛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이 조에의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조에의 생명과 삶은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64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요한복음 64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인간들에게 비오스의 생명이 아니라 조에의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시지만 이 조에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택하시고 부르시는 분이 계시며, 이끄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조에의 생명으로 이끄시는가 하면 바로 성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조에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과 삶이 주어지게 된 것은 내가 아닌 하나님의 이끄심이 내게 있었다는 것이며, 그 이끄심을 통하여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분으로부터 비오스의 생명에서 조에의 생명으로 바뀌어진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단순히 착한 사람이 아니라 조에의 생명 즉 새로운 삶으로 부르심은 받은 변화된 사람들이며,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하며, 위하여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자이며, 생명을 가진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에 대한 바른 이해를 요한복음 33절에서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 복음 3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어떻게 조에의 생명을 얻으며, 조에의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하여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듭나다 라는 단어는 두 단어로 거듭이라는 단어와 나다 라는 단어가 따로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로는 겐나오와 아노덴 이라는 단어인데 겐나오 라는 단어의 뜻은 태어나다, 출생하다 라는 뜻이며, 아노덴은 위로부터 라는 뜻입니다. 즉 거듭난다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위로부터 태어나다 라는 뜻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다 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위로부터 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첫째로 태어나다 라는 말은 시제적으로 단회적인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즉 조에의 생명은 단회적으로 받는 것이며,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사라지지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면 그에게 주어진 조에의 생명은 없어지지 않으며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에의 생명을 얻게 된 자는 어떻게 살아도 되는가? 죄를 짓고 예전의 삶과 동일한 삶을 살아도 취소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비오스의 생명에서 조에의 생명으로 변화되며,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는 결코 다시 옛날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비오스의 삶인 자기 중심적 삶으로 살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변화 되었으며 비오스의 생명이 없어지고 조에의 새 생명이 그에게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 조에의 생명은 수동형으로 사용되어 이것이 인간의 내면에서나 또는 그의 선택과 결정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데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새 생명으로 이끌림을 받아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됨으로 주어진 새 생명이기 때문에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연적 출생에서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명을 선택하거나 결정해서 태어나지 않으며, 우리가 부모를 선택하거나 환경을 조정하여 태어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 출생은 오직 위로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사실임을 우리는 다른 성경 구절을 통하여 확인하게 되는데 요한 복음 112-13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이 구절만 이해하면 누구나 그리스도를 자신의 의지로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2절은 13절에 의해서 제한 되는데 이는 즉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어떻게 주어지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에 대하여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즉 이것은 사람의 출생 방식으로 또는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럼 어떻게 조에의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다 라는 말은 겐나오로 위로부터 태어난 자들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첫째로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전적인 주권이 성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로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구원이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아니라 비오스의 삶으로 끝마칠 인생이 조에의 영원한 삶으로 그리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 변화되고 새롭게 태어나진 본질적으로 달라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내게 주는 유익은 첫째로 말로 할 수 없는 위로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것이며, 주어진 것입니다. 노력이나 애씀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지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지식이나 재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그 생명을 내가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내가 조에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며 위로가 됩니다. 둘째로 나의 삶을 대하는 자세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비오스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것 밖에는 모르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시며,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나의 삶이 비오스의 만의 삶이었으며, 내가 소망이 없는 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조에의 생명을 얻었고 그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과 다른 이들을 위한 삶으로 살아야 됨을 알며, 내 안에 나를 중생하게 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며, 이끌어 주실 것을 믿고 순종하며 살면 그러한 삶이 매일의 삶 가운데 지속될 것을 믿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조에의 생명을 얻은 자이며, 그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