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일체 오래 참으심을 알아야 할 인생 딤전 1장 15절부터 16절

by YC posted Jan 2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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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_JcDaK6fW8c


기질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즉 외향적인 것은 좋고 내향적인 것은 나쁘고 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기질들이 우리를 통하여 가장 아름답게 나타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질들은 죄로 물들었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의도와는 다르게 변질되어 육체의 소욕과 맞물려 나타나게 됨으로 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기질을 바르게 회복해 나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질을 온전하게 회복해 나아간다는 의미는 기질 자체가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안습니다. 기질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고유한 성향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기질이 바뀌지는 않지만 기질이 밖으로 드러날 때 함께 나타나게 되는 죄들을 억누르거나 없앨 수가 있습니다. 기질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인격 혹은 성품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기질에 자라온 배경이나 학문, 지식, 경험등이 결합되어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질을 알고 훈련하고자 하는 것은 기질이 밖으로 나오는 형태인 인격과 성품을 바꾸기 위해서 입니다. 기질이 바뀔 수는 없지만 타락한 기질이 가지고 있는 죄성과 악함을 말씀과 훈련 그리고 우리의 내면을 바꾸시는 성령을 통하여 변화되는 인격으로 성품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주도형의 대표적 인물이 바울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이 기질이 가지 있는 대표적인 특성들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사울이 변화된 후에 바뀐 이름입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사울입니다. 그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사도행전 7장에서 입니다. 행전 7장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7명의 집사중 한 분이셨던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는 장입니다. 그는 성문 밖으로 끌려 나와 돌 팔매 질을 당해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의 사건 가운데 사울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81절을 보면 여기서 마땅히 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동의하다 라는 뜻이지만 만족해 하고 즐거워하며 박수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박수를 치고 있는 잔인한 사람이었으며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의 눈에는 광기가 있으며 은혜와 궁휼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사람 같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사도행전 83절에서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는 그의 모습을 통하여 학인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교회를 잔멸 즉 파괴시키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교회를 무너뜨리고 파괴하려는 그의 행동은 멈추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는 동사를 사용함으로 그가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도 모라자라서 그는 다메섹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멸하려고 합니다. 독선적이고, 포악하고, 잔인하며, 인정사정 두지 않으며, 광기가 있는 그가 변화된 것은 사도행전 9장입니다. 그의 회심 사건은 우리가 잘 아는 데로 그가 주의 제자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9 3-4절부터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3-4절을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내려온 빛에 의해 그는 땅에 엎드려짐을 당하였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가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주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분명하게 구분이 됩니다. 그것은 바울 만이 아니라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주님을 만난 경험은 다를 수 있습니다. 바울처럼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둘러 싸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말씀을 읽는 가운데 복음을 듣는 가운데 기도하는 가운데 친구로부터 이웃으로부터 목사님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모두 다른 경험과 체험을 가지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를 만나면 그것이 새로운 인생의 분기점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났음에도 내 인생이 만나기 전이나 만난 후나 변화가 없고 구분이 되지 않는 다면 심각하게 고민하셔야 합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듣는 것이 달라집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자신이 세우고 스스로 뜻을 세우고 스스로 옳다 생각하는 것을 위해 목숨을 다해 달려가며 추구했습니다. 그것을 막는 것은 어느 것도 용납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무섭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눈을 불을 켜고 죽이려 위협하며 집에서 이끌어 내어 옥에 가두는 이 사람이 변화되리라 누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우리가 아는 바울이라고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가 변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115절을 보면 15절 마지막 내용을 보면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괴수라고 표현합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는 표현은 으뜸이나 앞선 자를 가리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도 대단한 변화인데 그는 자신이 그 죄인들 가운데 으뜸인 자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궁휼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만하고 거만하며 자신 밖에 모르며 자신의 하는 일이 옳고 정당하며 당당하던 그였습니다. 스데반의 죽음 앞에도 자신의 의를 드러내면 돌을 던지던 자들의 옷을 맡아 자신이 의로운 증인으로 나타내던 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살기와 위협으로 끌어 내어 옥에 가두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까?

또한 디모데전서 116절을 보면 [바울은 주님이 자신을 일절 오래 참으셨다고 하십니다. 주님을 만난 주도형은 주님이 자신을 얼마나 참으시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자신도 남에 대하여 관대하며 참아 줄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철저한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며 끊임없이 남을 비난하며 함부로 대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은혜를 받은 자인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남을 용서하고 용납하고 배려하며 높여주고 섬길 수 있는 것은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자인가를 알고 경험할 때입니다. 주님을 깊이 경험하십니다. 바울처럼 주님을 깊이 만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셔야 합니다.

바울과 같은 주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주도권의 상실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이끌려 가는 것이 이들에게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주도하지 못하고 맡기며 의지해야 되는 상황은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 그의 인생의 주도권을 주님께 의지하며 복종합니다. 로마서 1:1절을 보면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종이라는 표현은 노예를 의미합니다. 자신을 노예로 표현한다는 것은 묶인 자이며 주인의 뜻에 따라 움직이며 주의 말에 복종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주도권을 예수 그리스도께 넘겨 드린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빼앗긴 것도 아니고 잃어 버린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는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8절을 보면 빌3:8절 그는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분을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주도권을 버렸고 자신의 목표와 비전을 버렸습니다. 자신의 옳다 하는 경험을 버렸고 자신의 학식과 지식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데 인생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바뀌어야 합니다.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 기질은 굴복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모든 오만과 자만과 교만에서 벗어나기 위해 날마다 몸부림쳤던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전 15:31절을 보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그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하나님 없이 살려는 교만 앞에 스스로를 죽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 높아지려는 오만함 앞에 스스로를 죽이는 것입니다. 자신을 쳐서 날마다 복종시키려는 바울의 노력입니다. 그가 평생 변함없이 신실하게 말씀을 붙들고 살수 있었으며 끝까지 달려갈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자기 죽임 때문입니다. 디모데 후서를 보면 그가 죽음 앞둔 시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떠나고 힘든 외로움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디모데를 향하여 자신은 이미 관제 즉 제물 위에 부어지는 포도주나 기름을 뜻하는데 그렇게 부어져 하나님께 바쳐질 순교의 준비가 되어있음을 말합니다 이렇듯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자기 죽음입니다.

그가 자기를 죽임으로 인하여 얻은 것은 갈라디아서 617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입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흔적이라는 것은 소유권의 인정을 위해 몸에 난 뚤린 자국이나 낙인 자국을 의미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유로 자신의 몸에 노예로써의 자국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복음을 전하다 당한 고난과 핍박으로부터 얻은 육체의 상처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그가 주를 닮기 위하여 살았던 그의 삶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그분과 같은 길을 가기에 흘려야 했던 눈물과 아픔과 고난과 고통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위해 참고 견디며 인내함으로 얻어지는 흔적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남들 앞에 모욕을 당하여 수치를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 낸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남을 세우기 위해 먼저 낮아지며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섬겼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가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손해 보며 피해를 감수했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기질은 한 순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매 순간마다 나의 왜곡되고 비틀어진 기질과 인격을 잘라내고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해서 한 순간에 그의 주도적인 기질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1537-39절을 보면 바울은 두번째 전도여행에서 마가를 배제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는 일까지 합니다. 일 중심적이고 성취 중심적인 그는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갈 수 없으며, 그를 용서하지 않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11절을 보면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고 하는 말속에서 그는 마가를 용서하였고 다시 그를 받아 들이며, 이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디모데 후서는 그가 순교하기 전에 쓴 옥중서신입니다. 그의 인격이 그의 인생 전체에 변화의 과정 속에서 새롭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 주도적인 성향을 가진이들은 자신을 낮추어야 하며, 자기 주장을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종됨을 인식하며 남을 높이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또한 내가 남을 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일체 오래 참고 계심을 항상 명심하여 자신의 행실에 주의하며, 겸손함으로 자신의 모난 인격이 다듬어 지게 만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