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s8YoMloVNZE
인간은 왜 죽게 되는가? 라는 질문은 모든 인간이 고민하고 생각해 보았던
질문이며 이것을 극복해 보고자 수많은 시도와 노력이 있어왔지만 어느 누구도 이 문제 앞에 서서 이겨내거나 극복해 낸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분들은 인간의 죽음은 죄로 인한 결과라는 것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적 계획 속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본래적인 것도 처음부터 존재하며 함께 하였던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먼저 창세기 2:16-17절을 보면 이 구절은 성경에서 죽음이 최초로 언급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죄와 죽음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명령하십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죽는 다는 말은 분명히 또는 확실히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17절에서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이 죽다 라는 단어
무트는 일차적인 의미가 육체적으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죽음이 죄의
결과로써 인간에게 귀속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죽다라는 말이 일차적인 의미에서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지만 성경의 나머지 내용들과 함께 생각해 볼 때 여기서 경고된 죽음이라는 것이 단지 육체적인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인간이
죄로 인하여 육체적인 죽음의 지배아래 들어갔지만 또한 그들이 지은 죄는 그들로 하여금 영적인 죽음 가운데 이르게 하여 하나님과 교제의 단절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주셨는데 그 생명의 의미 가운데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창세기 2:17절의
죽다라는 것이 영적인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으며 관계가 죽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는데 여기서 우리는 죽은 자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바로 영적인 죽음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 또한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5:12절을 보면 여기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 한 사람이 가리키는 것은 아담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결과 사망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즉 사망은 인간에게
있어서 본래적이거나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망은 죄가 들어온 결과이며 죄의 지배로
인하여 인간은 사망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이 복음이라고 부르며 우리가 복음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인간에게
비본질적이며 비 본래적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10절을 보면 이 구절에서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타나심으로 이 세상에 분명히 나타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망을 폐하셨다는 것이며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밝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나타나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정복하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이 폐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책에 대하여도 사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망이
폐하여졌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망이 폐하여졌다는 의미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쓸모 없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사망이 더 이상 왕 노릇 하지 못한다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이제껏 우리는 육체의 죽음이 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죽음이
폐하여 진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우리가 생명과 썩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한 것은 죄의 결과에서 우리가 자유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만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인해 우리로 하여금 죄의 책임 즉 죄에 대한 대가에서도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신자가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우리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의미를 넘어 우리의 죄책이 사라졌다는
것이며 죄를 지은 자가 받는 죽음의 저주에서 풀려났으며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난
것이 바로 신자가 얻은 복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은 신자들은 왜 여전히 죽어야 합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왜 신자는 이 땅에 사는 날이 끝날 때까지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즉시 하늘로 올라 갈수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오실 때에 신자는 이 땅에서 죽음을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순식간에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 될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42문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죽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의 죽음은 우리 죄를 위한 보상이 아니라 죄에 대해
죽은 것이요 영생에 들어가는 것일 뿐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에게는 그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생명으로 지불하시고 갚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죄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이제 완전히 죄에 대하여 끝내는 것이며 완전히 죄와 분리되는 것이며 완전히 온전하여 지는
것이며 영화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죽음은 육체의 욕심과 육신에 속한 것들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기에 복이며 영광스러운 것이며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지금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에 죄에 대해 죽는 것이다 라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삶에서 죄는 신자가 져야 하는
가장 무거운 짐이자 고통입니다. 로마서 8:23절을 보면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은 우리도 속으로 탄식하며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문제로 인하여
내면이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이 오래면 오랠 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 모습이 더 많이 질 뿐만 아니라 더욱 자신의 연약함을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사모하게 되는 것은 속히 우리의 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육체의 죽음은 바로
이러한 구속의 완성이며 우리의 죄된 몸에서 해방이며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의 죽음 영원한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영원한 생명에 들어간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맛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는 동안 그 기쁨을 누리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것도 풍성한 것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는 풍성함은 우리의 육체의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며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완전한 평안과
완전한 기쁨과 완전한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며 완전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있어서 육체의 죽음입니다. 그렇기에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리고 이 땅에서 함께 하던 모든 것과의
이별은 슬픈 것이 아니라 고대할 뿐만 아니라 기쁜 것이며 감사한 것이며 복된 것이며 영광스러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