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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5편 15-16절을
보면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다고 합니다. 이는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모든 사람의 눈이라고 표현한 히브리어 단어를 의역한 것인데 모든 사람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모든
눈들이라는 표현 만이 있는 것입니다. 즉 모든 만물의 눈들이 주를 앙망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앙망이라는 단어는 계속해서 주목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치
먹을 것을 들고 있는 주인을 바라보며 쫓아 다니는 반려동물과 같은 행동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때를 따라서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손을 펴셔서 모든 생물의 소원을 채워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더욱 분명하게 모든 생물이라는 표현과 소원을 만족하게 하신다고 하는데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으며 보이지 않은 것 조차도 만드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작정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사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계획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계획을 실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시기 위해 계획하고
만드시기만 하신 것으로 자신의 일을 마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며,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결과입니다.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그 작정하신 목적에 합당하게 유지하시고 보존하시며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는 성경 구절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16-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왜 하시는가 하면 유대인들의 오해 때문이며, 무지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하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고 속에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사역을 멈춘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천지
창조 후에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은 끝이 난 것입니다. 더 이상 창조할 것이 없이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의 사역은 끝이나 안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위한 사역이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저절로 움직이며, 스스로 보존하며, 스스로 유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 이후에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물을 위한 섭리는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왜 일을 하느냐는 말에 내 아버지께서는 안식일에도 모든 만물을 보존하시고, 모든 만물을
먹이시며, 모든 만물의 필요를 채우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일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 속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는 일반 섭리가 있습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은혜입니다. 즉 모든 만물을 돌보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9절부터 31절 말씀을 보면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반섭리와 특별 섭리입니다. 특별 섭리는 차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구절에서 일반 섭리는 하나님은
참새 하나도 자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 우연이 아니고 또는 자연 법칙의 결과가 아니고 하십니다. 참새가 죽는 일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겨울에 먹이를 구하지 못해 배고프고 얼어 죽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잡으려는 덫에 걸려 죽을 수도 있고 늙어서 죽을 수도 있고 상위 포식자에게 잡혀 먹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참새 한 마리의 죽음에 대한 수많은 이유와 원인들을 말할 수 있지만 성경은 반드시 그러한 우리가 이해하는 자연법칙과 각각의 상황 안에서 원인이
결과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원인을 원인 되도록 개입하시는 분이시며 원인이
결과가 되도록 조정하시고 만드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원인이자 결과의 근원이십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만물의 원인자 이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냥 지켜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저절로 돌아가는가만 바라보고 고장이 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스템 관리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까? 왜 그분을 예배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까?
그분 만이 세상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매일 매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하나님의 간섭이 있고
하나님의 주권이 담겨 있다면 어떻게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그분께 우리 인생을
맡기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여러분들은 무슨 배짱으로 세상의 주인으로써 만물을 매일 매시간 자신의
뜻 가운데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려 하십니까? 모든 만물을 움직이며 살아있게 하시며 모든
것의 원인과 결과를 만들어 내시며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다면 우리의 인생을 매일 매일의 삶을 그분께 의탁하며 그분께서 우리의 삶을
지켜주시고 모든 원인과 결과까지도 그분의 손안에서 보호와 돌보심을 받기 위하여 간구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도우심 없이 우리의 인생은 존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안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참새는 가만히 자신이 지은
집에 앉아 있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새로 하여금 먹이를 찾게 하시고
먹이를 잡게 하시는 방식을 통하여 그것들을 먹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법칙이며, 생존 법칙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참새가 하나님 없이 자신의
노력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것들이 먹이를 찾게 하시는 방식과 먹을 잡을 수 있게 하시는
방법을 통하여 먹이시고 기르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을 보면 공중의 새를 볼 때에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새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기르시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본능에 따라 먹이를 찾으며, 구할
때에 하나님은 그러한 방식으로 그것들이 생존하도록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게으름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26절을
보면 이 구절의 문맥은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 가운데 달란트의 비유로 일컬어지는 내용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에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겼습니다. 그
중에 주인의 소유 중에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이 주인이 돌아왔을 때 보인 행동을 보고 주인이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주인의 종에 대한 책망의 내용 가운데 주인은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에 대한 평가요 종의 성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이라는 단어가 비록 그의 행동에 대한 것이지만 이것은 행동만이 아닌 그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유발시킨 그의
정신의 문제이며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가 게으르다는 책망을 받은 것 또한 행동의 문제 이전에
그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 그의 마음의 상태의 문제이며 사고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악함과 게으름은 결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게으른 것 자체가 악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종은 주인의 소유물에 대한 책임에 있어서 게으른 자였고 그러한 이 종은 악한 종인 것입니다. 즉 게으름이라는 것에 대한 성경의 정의는 악이라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에서 벗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일에 대하여 반대가 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은 우리의 삶을 갉아 먹는 좀과
같으며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목적과 의도에 대하여 어긋난 삶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가치 없고 의미 없는 불행한 인생으로 던져 넣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을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는 마지막 권면의 내용 가운데 세월을 아끼라고 합니다. 바울은 은유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월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유형의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마치 형체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끼라는 단어의 뜻은 사는 것을
말하며 속량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쓸모 없이 그리고 의미 없이 버려지지 않도록 매 시간을 값을 지불하고
사서 의미 있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럼 세월을 가치 있고, 의미
있도록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 시간을 주신 하나님을 향한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며 노동이며 일입니다. 게으름의 문제는 세월을 아끼려 하지 않으며 노동과 수고로 사지 않고 허비하며 낭비하며 방종으로 허송세월 하게
만든 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욥기 1장 10절을 보면 주께서 욥과 욥의 집과 욥의 모든 소유를 울타리로 두르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울타리를 치우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곤두박질 치며, 어려움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욥이 자신의 인생은 선한 것 가지고는 정직한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은 사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없으며, 일반 섭리가 우리 가운데 멈추는 순간 우리는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의해서 살며,
그분이 먹을 것을 주심으로 먹고 삽니다. 세상 사람과 우리의 다른 점은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을
모르고 어리석게 사는 것이고, 우리는 알고 지혜롭게 사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알기에 매일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고, 매일 하나님을 기뻐할
줄 알며,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