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1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보냄을 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을 사도라고 칭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는 반드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7-8절을 보면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뿐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게 되는데
사도행전 26장 16-17절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것은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그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이 자신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할 때에
그가 의도하고 있는 것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쓰고 있는 이 편지는 바로 그가 주님을 본 것과 장차 그에게 나타날 일에 대하여 증거하시기 위한 목적
가운데 쓰여지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그가 기록하여 보내는 이 편지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며, 가르치신 것임을 의도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증거들은 다른 그의 서신서들에서도 발견되는데 고린도전서 11장 23절을
보면 바울이 자신이 전한 것은 누구에게 받은 것이라고 합니까? 바로 주님께로 부터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증거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이유와 그가 자신을 그리스도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은 사도라고 증거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절을 보면 초대 교회때에 교회들을 힘들게 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사도라 부르며 자기 권위를 세우며, 그것으로
거짓된 것을 가르쳐 교회를 어지럽게 하며, 교인들은 미혹하는 일들을 한 것입니다. 잘못된 교리와 잘못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은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며, 교회
안에 악한 것들과 부패하며, 불의한 것들이 용납되게 하여 더럽혀지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렇게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은 계시를 받아 사도가 되었으며,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자신들이 사도적 권위를 계승 받은 교회라고 소개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거짓이며, 속임입니다. 골로새서 1장 1절을
보면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데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디모데는 형제라고 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과
빌립보서 1장 1절을 보면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를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은 사도이지만 디모데는
사도가 아니며, 그러나 둘은 동시에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에 대하여 구별하고 있으며, 이것은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에 대한 중요성은 로마서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복음을 전하려고 이 서신서를 쓰는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계시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 입니다. 또한 그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1장 1절을 보면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하심을 입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에 어떠한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없이 일을 시작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즉흥적이거나, 충동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며, 그분이
하시는 일의 방식과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이며, 그분은 자신이 전하시는 복음에 대하여 오랫동안 준비하셨고, 계획하셨으며, 그것을 이루셨고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택정하셨는데 이 택정이란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언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하시고 구별하신 것이 사도행전 9장에서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음을 위하여
택하시고 구별하신 것이 이미 그 전부터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5-16절을 보면 하나님은 바울이 그의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부터 그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때부터 그를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다소에서 나게 하셨고,
유대인으로 그리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정통 유대교를 배우게 하셨고, 헬라 문화에 익숙하게
하셨으며, 로마 시민권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하심을 받아야
할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실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가 스데반을 죽이는 데에 동의하며, 참여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가 살기 등등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는 일을 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내버려 두셨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스데반의 죽을 때에 회심하게 하지 않았는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 할 때에 그를 막으시고, 변화시키지 않으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것은 바울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은 것도 아니며,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셨고, 그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부르셨고,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택정하셨듯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정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우연이 아니며,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도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창세전에 정하셨습니다. 그분의 자녀로 정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9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이라는 표현은 창세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때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그때에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미리 아셨고 정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창세 전에 이미 택하심을 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시고 우리의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에 이미 우리를 아신 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 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택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일을 하신 하나님은 놀라운 분이시며, 경의로운 분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신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해 내셨으며, 악한 것들에게 구별하여 내셨으며, 멸망 당할 것들로부터 우리를 구별해 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구별하신 분의 뜻을 쫓아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