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43xTkziOWPA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 그리고 날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되는지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이 주기도문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한 구절은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6장
13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3절을 보면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여기서 악에서 구원하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악에서
구원하다는 말은 죄를 짓지 않게 하시옵소서 라는 말이 아닙니다. 영어 번역을 보면 악한 자에게서 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겪게 되는 문제는 악한 자가 믿음을 흔들고, 신앙을 흔들고, 삶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지 못하도록 하며, 오히려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지식을 의지하고, 능력을 의지하며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하지 않고 잊게 하며,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것처럼 믿고, 의지하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가 날마다 신자의 눈을 가리워 삶을 세속적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아시며, 우리의 싸움이 강력한 사단과의 싸움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며,
지키시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 중에 두번째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이며 입혀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 6장 14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취하라는 명령 가운데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입고
무엇을 취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두번째 내용으로 진리로 허리 띠를 띠라 라는 말씀 다음으로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6장 14절을 보면 [엡 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Stand firm then, with the belt of truth
buckled around your waist, with the breastplate of righteousness in place, 우리는
앞서서 허리 띠라는 물질적인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이것이 물질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는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것을 말하기 위하여
그것을 실제로 이해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것을 은유적 표현 방식을 통하여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의의
호심경이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흉배 라는 표현이 저한테는 좀더 친밀한 용어인데 이것 또한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을 통하여 영적인 것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은유입니다. 먼저 성경의 다른 부분을 이 본문과 잘못 이해할 수 있음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8절을 보면 [살전 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But since we belong to the day, let us
be sober, putting on faith and love as a breastplate, and the hope of salvation
as a helmet.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우리가 낮에 속하였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의의 호심경과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은 같은
것이다 라고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같은 호심경이지만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의의 호심경입니다. 지금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마귀와의 영적인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전신 갑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데살로니가 5장 8절의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은 그 결이 다른 의미입니다. 다시 에베소서 6장 14절을 보면 [엡 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Stand firm then, with the belt of truth buckled around
your waist, with the breastplate of righteousness in place,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그 배열에 있으며, 그 순서는 실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육체의 허리는 육체의 힘을 결정한다는 이유 때문에 허리에 띠를 두르는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허리는 전체의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무장을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허리띠는 그 밖의 모든 것을 고정시키고 조여 맵니다. 그럼 이제 의의 호심경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울이 유념하고 있는 흉배는 그 당시 로마의 병사가 착용하였던 것입니다. 당시의
로마 병사들이 흉배를 하고 있는 모습은 그 당시의 로마의 세계에서는 아주 흔한 모습이었습니다. 흉배는
일반적으로 목 밑에서부터 허벅다리 위부분까지 늘어져 있었으며, 그래서 그것은 흉부와 복부를 덮었습니다. 헬라어의 의미는 이에 부합하는데 가슴에 대는 방패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복부까지도 덮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에서 흉배라고 할 때에 그는 이것을 사람의
몸통이라고 부르는 모든 곳을 보호하는 갑옷의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의 중요성은
이것이 보호하는 몸의 여러 기관들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갑옷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이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심장과 폐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생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며,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기관이 뱃속에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옛날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 몸 속의 기관들에 대하여 똑 같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뱃속의 여러 기관들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에 특이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시편 16편 7절을 보면 [시 16: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I will praise the Lord, who counsels me;
even at night my heart instructs me.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 하도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양심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원래의 뜻은 신장입니다. 즉 콩팥입니다. 한 구절을 더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31장 2절을
보면 [렘 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Is not
Ephraim my dear son, the child in whom I delight? Though I often speak against
him, I still remember him. Therefore my heart yearns for him; I have great
compassion for him," declares the Lord.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면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책망할 때에 깊이 생각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실 때에 깊이 생각하시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며, 이 들끓음의 의미는 가슴이 아프다는 의미로 왜냐하면 그들을 불쌍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우리의 내면의 기관들에 대하여 말할 때에 그 기관들이 단순한 기관들이 아니라 양심이나 마음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것은 신약 성경에서도 말해지고 있는데 빌립보서 2장 1절을 보면 [빌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Imitating Christ's
Humility] Therefore if you have any encouragement from being united with
Christ, if any comfort from his love, if any common sharing in the Spirit, if
any tenderness and compassion, 여기서 긍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창자 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즉 긍휼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창자 즉 내장에서 나온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의학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람들이 이러한 표현을 쓰는 방식을 이해하여야 하는데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이 여러 가지
기분이나 감정을 느낄 때에는 몸의 내면 기관의 어떤 장소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특별한 고통의 원인은 특별하게 자리 잡고 있는 기관이 있기 때문이라고 추론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여기에서 우리에게 의의 흉배를 붙이라고 말할 때에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싸우고 씨름 할 때에 기분과 감정을 조절하는 곳을
보호하는 일에 가장 조심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이 행동을 주관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감정을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인간과 인간의 인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의 조명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은 바울은 우리의 기분과 감정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아주 두드러진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귀도 역시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기분과 감정 위에 작용을 하여 자신의 치명적 목표와 목적을 위하여 도움이 되도록 사용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매우 주의 깊게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와 마찬가지로 양심도 보호하여야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능력을 가진 도구는 바로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 모두가 살면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는 양심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쉽게 상하여 낙심하기도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흔들리며, 의심의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하나님께 원망하기도 하며, 불만족함으로
불평하기도 합니다. 마귀는 이러한 우리 주변의 환경과 일어나는 일들을 통하여 우리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
헛된 일에 수고하게 하며, 신앙과 믿음을 위한 노력이나 수고가 헛되다고 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갈팡질팡하는 삶을 살게 하며, 우리의 인생의 길을 어그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흉배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흉배가 무엇을의의 보호하는 것인지를 알겠는데 왜 의의 흉배가 필요하며, 그것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에베소서 6장 14절을 보면 [엡 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Stand firm then, with the belt of truth buckled around
your waist, with the breastplate of righteousness in place, 여기서 우리가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해야 할 단어가 의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흉배인데 이 흉배는 의의 흉배 입니다. 여기서 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의라는 것을
잘못 해석한 번역 본이 있는데 새 영어 성경 New English Bible 에서는 완전이라는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인 완전을 확신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또한 공명정대하고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타락한 인간과 또한 중생하였음에도 여전히 죄의 오염 가운데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64장
6절을 보면 [사 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All of us
have become like one who is unclean, and all our righteous acts are like filthy
rags; we all shrivel up like a leaf, and like the wind our sins sweep us away.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의롭다 한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다 더러운 옷과 같으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 우리 스스로 어떠한 의를 내세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참된 신자는 압니다. 빌립보서 3장 4절을 보면 [빌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though I myself have
reasons for such confidence. If someone else thinks they have reasons to put
confidence in the flesh, I have more: 바울은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만일 누군가 개인적인 완전과 본래적인 의를 경쟁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 경쟁에 참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매우 훌륭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다음절이 5-6절을 보면 [빌 3:5-6]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circumcised on the eighth day, of the people of Israel, of the
tribe of Benjamin, a Hebrew of Hebrews; in regard to the law, a Pharisee; as
for zeal, persecuting the church; as for righteousness based on the law,
faultless.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며, 베냐민 지파이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 자신이 의롭다고 한다면 나 또한 그러하면 내가 더하면 더 했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의를 따진다면 내가 누구와도 견줄 수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이 정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으며, 자신을 완전한 자로 여기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음 절인 7절을 보면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But whatever were gains to me I now consider
loss for the sake of Christ.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이라고 합니다. 왜 이것이 좋은 것이라면, 이것이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며, 자신의 의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면 왜 해로 여깁니까?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의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참된 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9절에서 참된 의가 무엇인지 자신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3장 9절을 보면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and be found
in him, not having a righteousness of my own that comes from the law, but that
which is through faith in Christ-the righteousness that comes from God on the
basis of faith. 바울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가 바로 자신이 가진 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4절에서 의의 흉배를 입으라고 할 때에 의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고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준비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나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생활을 하고 우리의 존재가 어떠하며,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고 남들이 우리를 칭찬하고 옳게 보여도 그리고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하였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는 소망이 없는 죄인이며, 전혀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비하신 것이며, 마련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완전하게 준수하심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으셨으며,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의 의를 내가 한 것으로 계산하시며, 내가 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나에게 옷 입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은 나를 보시지 않고 나를 감싸고 완전히 옷 입히고
있는 자신의 아들의 의를 보시는 것입니다. 이 의가 왜 우리에게 흉배가 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흉배가 보호하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장기들입니다. 이 장기들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며, 양심이며, 우리의 생각이며, 우리의 의식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지켜야 하는 이유는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의심과 불신의 씨앗을 뿌리며, 불안과 불만을 조성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치게 하거나 또는 우리의 마음을 죽음에 대한 공포나 삶의 문제에 짓눌리게 하여 우리의 마음에 기쁨을 상실하게 하고, 좌절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멈추게 하며, 우리 마음에서 영적 즐거움을
빼앗아 갑니다. 예배의 감격이 시들어지고, 기도의 즐거움과
기쁨이 변하여 마지 못함과 억지로 하며 그것마저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이 받지 못하도록 세상의 염려로 가득하게 하며, 생활의 염려로 우리의 마음을 영적인 일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이러한 마귀의 궤계는 결국 신자의 마음을 병들게 하며, 신앙
생활을 멀리하며, 하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하며, 우리의 양심을 보호해야 합니다. 깊은 좌절과 슬픔과 절망을 이겨내며, 불신의 벽을 뛰어 넘고,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마음에서
일어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신 의로 인하여 우리는 의롭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며, 그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하나님의 의는 결코 우리에게 어떠한 정죄도 없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은 한이 없으시며,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설득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 하며, 현실을 바라보려 하는 우리의 영적 눈을
하나님께 고정하며, 하나님만 바라 보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의 흉배는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의를 바라보며 또한 우리에게 주신 의를 통하여
우리 또한 더욱 거룩해지며, 경건해지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속이지 못하도록 방어하며, 마귀의 공격이 무디어지도록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의 흉배를 입는 일이며, 의의 흉배의 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