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9HtKoQOSUFg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내용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 가운데 네번째 부분에 대하여 입니다. 에베소서 6장 16절을
보면 [엡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In addition to all this, take up the shield of faith, with which
you can extinguish all the flaming arrows of the evil one. 바울은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라고 하는데 가지고 라는 말은 취하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앞서서 살펴본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모두 6부분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 여섯은 두 개의 단락들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우리는 앞서 세개를 살펴 보았고 이제 나머지 세개를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가 두번째 단락을 살펴
볼 때에 첫째 단락의 부분들과 다른 점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먼저 모든 것 위에 라고 말함으로 이러한
사실을 환기시킵니다. 모든 것 위에 라는 말은 중요성에 있어서 모든 것보다 위에 라는 뜻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의미는 이미 언급된 갑주의 세 부분들 위에 또 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의도적으로
주의를 환기하며 앞으로 말하게 될 하나님의 전신 갑주 또한 중요한 것임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볼 두번째 단락이 앞의 첫번째 단락과 다른 점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데 이러한 내용은 영역 본에서 그 의미를 찾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의 첫번째 단락에서 세
개의 갑주는 모두 가지다 즉 영어로 having으로 번역됩니다.
NIV에서는 with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4-15절을 보면 [엡
6:14-15]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Stand firm then, with the belt of truth buckled around your waist,
with the breastplate of righteousness in place, and with your feet fitted with
the readiness that comes from the gospel of peace. 즉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가지고 의의 흉배를 가지고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가지고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두번째 단락에서 세개의 전신 갑주들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취하는 taking을 사용합니다. 다시 에베소서 6장 16절을
보면 [엡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In addition to all this, take up the shield of faith, with which
you can extinguish all the flaming arrows of the evil one. 그래서 믿음의 방패를
취하고, 구원의 투구를 취하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의 것과 뒤에서 것의 차이를 영어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having과 taking으로 구분하여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갑주의 기능적 차이 때문에 이러한 단어의 번역상 차이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갑주의 첫 세 부분은 몸에 고정되는 부분들입니다. 우리는 허리띠의 경우가 그러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고정시키는
어떤 것입니다. 허리 띠는 고정하여 움직이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의의 흉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몸에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신발의 경우도 분명히 고정시켜야 합니다. 이처럼 앞의 갑주의 세
부분은 움직이지 않도록 견고하게 몸에 고정시키는 도구들입니다. 그러나 다음의 세 부분은 다릅니다. 군인들은 방패를 몸에 고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몸에서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군인들은 그것을 취하여 사용하지만 몸에 부착시키지는 않는 것입니다. 머리에 쓰는 투구나
검 역시 그렇습니다. 이러한 갑주의 다른 점은 첫 단락의 갑주들은 다소 수동적이고 준비적입니다. 군인은 그것을 몸에 붙이고 간직합니다. 그러나 두번째 단락의 갑주들은
즉시 적극적이라 생각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군인들이 막사에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배와 신을 신고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적이 공격해 오고 있다는 경고를 들으면 그는 즉시 그의 방패와 검을 취하고 투구를 쓴 후 달려 나갑니다.
적극적인 면 즉 실제적인 싸움과 전투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군인들은 휴식을 취할 때에
손에 방패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내려 놓습니다. 투구도
마찬가지 이며, 검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적이 활동하게
되어 싸움이 시작되면 군인들은 그 싸움을 대비하기 위하여 이것을 집어 듭니다. 이제 방패의 실제적 사용법과 또한 영적인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예를 들어 말하는 로마 군인은 매우 큰 방패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는 방패라면 조그마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용된 방패는 길이가 약 4피트 폭이 2.5피트
정도 되었습니다. 방패에 대한 첫 고안은 문짝에서 시작되었는데 사람들이 그 뒤에 숨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타원형으로 변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몸 전체를 숨기도록 고안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방패는 그 표면이 불연성 금속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전쟁에서 적들이 불이 붙은 창을 던질 때에 이 불연성 금속판에 떨어져서 불이 붙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방패는 이미 붙인 흉배와 진리의 허리 띠와 신발 외에 더 일반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이 앞에 오기 전에 던질지도 모르는 창과 같은 것에 대비하여
자신을 보호할 방패가 필요하며, 적이 더 가까이 왔을 때는 손에 칼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방패에 대하여 말하며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합니다. 불화살은 나무나 금속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의 특별한 특징은 뾰족한
끝을 가지고 있으며 타기 쉬운 물질이 함유되어 있는 물체로 만들어졌습니다. 가연성 물질이 함유된 이
물체는 일정한 위치에 단단하게 고정될 때까지 그 끝 둘레를 매우 단단히 감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적을
공격할 때에 이 가연성 물체에 불을 붙여 그것이 탈 수 있게 한 후에 그것을 적을 행하여 날립니다. 당시의
전쟁시에 군인들은 적들의 혼란을 야기하기 위하여 모든 방면에서 적에게 이 불화살을 많이 쏘곤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공격할 길을 준비한 후 병력이 진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16절에서 바울이 이러한 모든 불화살을 쏘는 자에 대하여 악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악한 사람 또는 사악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우리가 싸우고
있으며, 우리에게 모든 불화살을 쏘는 자가 마귀와 악한 영들로 영적인 싸움이지만 마귀는 인격을 가지고
있기에 영적인 인격자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마귀가 인격체라는 것은 마귀는
인격적인 힘과 지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 참여하며, 영적인
싸움을 한다고 할 때에 마귀와 직접 대면하여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하여
마귀와 우리는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9절을 보면 [요일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We know that we are children of God, and that the
whole world is under the control of the evil one. 여기에서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누구 안에 놓여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 안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은 사악한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악한 자는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강한자이며, 무장한 자입니다. 이 마귀의 공격은 치열하고 사나우며 때로는 돌발적인 습격이기 때문에 우리는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모든 그의 다른 활동 외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며 이 불화살 즉 화전도 사용합니다. 이 화전은 불길이 있어 활활 타오르므로 매우 파괴적입니다. 마귀의 불화살의 공격은 시도 때도 없이 공격하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어떤 것을 생각할 시간도 가지기 전에 악한 생각, 아마도 불경한 생각이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왜 이러한 생각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왜 이러한 생각을
지금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생각에 대하여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그것의 옳고 그름이나 그것이 일으키게 될 영적 문제나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일상의 생활 속에서 아무런 판단이나 분별없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내버려 두어
마귀가 이기게 합니다. 마귀는 그날의 기분이나 감정에 영향을 주어 관계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사소한 말다툼으로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칠 일들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하고, 감정을 상하게 하며, 화를 내며,
짜증을 내어 분란을 일으키고, 감정을 상하게 만듭니다. 일터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종종 평상시에는 그냥 지나칠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하고, 악한 감정을 일으켜
미움과 다툼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 고사성어 가운데 도끼를 잃고 이웃을 의심하다'는 뜻의 실부의린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늘 쓰던 도끼를
잃어버렸습니다.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그는 누군가 도끼를 훔쳐 갔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며 이웃집 아이를
유심히 보니 평상시와 달리 그 아이의 말과 행동이 몹시 수상쩍어 보였습니다. 결국 그는 이웃집 아이가
자기 도끼를 훔쳐 갔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던 그는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도끼를 어떤 나무 밑에서 찾았습니다. 전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도끼를 놓아둔 채 그냥
내려왔던 것입니다. 도끼를 가지고 돌아와 이웃집 아이를 다시 보니 말과 행동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사단은 감정에 의심을 심고, 미움을
심고, 탐심을 심습니다. 또한 불안을 심으며, 걱정의 심어, 불신의 열매가 열리도록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쏘는 모든 불화살은 우리의 믿음의 방패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우리가 믿음을 세우는 일이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하려 할 때에 더욱 크게
역사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있을 때나 혹은 기도하려 할 때 불화살은 여러 방면으로부터 우리에게
날아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려 할 때, 경배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데만 집중하려 할 때 우리의 마음이 산란해 지고 악한 생각들로 가득차게 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어디서부터 옵니까? 우리가 뉴스나 인터넷 서핑을
하며 시간을 보낼 때에 마음이 산란해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온갖 잡념이
일어나서 거의 그것을 읽는데 마음을 집중시킬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런
것은 분명히 우리 자신 밖에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또한 마귀의 화전은 우리에게 의심하는 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흔들게 하기
위하여 쏘아지기도 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의심하는 불화살을 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심은 모든 신자들을 향하여 쏘는 사단의 중요한 공격 방식입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일어나기도 하며, 자신의 경건한 삶에 대한 회의감과 기도에 대한 회의감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매일 말씀을 읽는 것의 필요성에 대하여 회의감을 가지며,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며, 오늘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 일어나지도 않는데 라는 생각을 합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도
잘 살았는데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았을 때가 더 좋았고 편안 했다고 생각되게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원망하며, 만나를 먹는 것에 실증을 느끼고 그들이 종노릇하며, 노예로 살았던 애굽 땅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처럼 그러한 생각이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을 보면 [벧전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Dear friends, do not be surprised at
the fiery ordeal that has come on you to test you, as though something strange
were happening to you.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은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참된 신자들에게는 당연히 오는 것이며, 이 불 시험의 목적은 우리로 연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연단이라는
것은 더욱 신앙을 온전하게 하며, 더욱 굳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참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쓰러뜨리기 위함이 아니며, 강건하게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강건하게 하며, 더욱 정결하게 하며, 더욱 온전하게 만드시길 원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가 자녀를
양육하며 훈련하여 온전하게 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것을
용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신앙을 담금질 하는 기회가 되게 하시며, 그렇게 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정금과 같이 순결하게 하시는 기회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3장 12절을 보면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In fact, everyone who wants to live a godly life in
Christ Jesus will be persecuted,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는 박해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사단이 어떠한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가 이미
자신의 소유이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자에게 어떠한 박해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박해를 이길 수 있는 것이 믿음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 일서 5장 4절을
보면 [요일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for everyone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This is the victory
that has overcome the world, even our faith.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세상을 무엇으로 이길 수 있는가 하면 그들의 믿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귀가 우리에게 시도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격퇴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믿는 것을 빨리
사용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지식적 신뢰나 이론 아닙니다. 믿음은
단순히 지식적인 동의와 신뢰에 그치지 않고 믿음은 실제적입니다. 믿음은 항상 진리를 사용합니다. 또한 믿음에는 행동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의 방패역할을 한다고 할 때 이 말은 결코 믿음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0-21절을 보면 [롬 4:20-21]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Yet he did
not waver through unbelief regarding the promise of God, but was strengthened
in his faith and gave glory to God, being fully persuaded that God had power to
do what he had promised.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졌다고 합니다.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가 하면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는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믿음으로 견고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향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하며, 하나님의 인격과 약속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격과
약속을 믿었으므로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거나 우리가
믿는 다는 것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 즉
하나님의 인격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라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바라보며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