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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2024.09.11 16:11

구원의 투구를 쓰라

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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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eMNCyqY1vq8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갑옷의 두번째 부분으로 몸에 붙어 있거나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병사가 갖고 다니며 써야 할 구원의 투구입니다. 에베소서 617절을 보면 바울은 성도들에게 구원의 투구를 가지라고 합니다. 바울은 당시에 전형적인 로마 병사의 모습을 보고 이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병사는 항상 투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몸의 모든 부분은 보호되고 감추어져야 합니다. 보통 전쟁에서 이렇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생활의 적용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바울이 보았고 생각했던 로마 병사가 쓴 투구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모자의 일종입니다. 이 가죽은 단단하게 다듬어졌고, 이에 더하여 가죽을 보호하기 위해 금속판이나 둥근 금속 조각으로 장식되었습니다. 그 위에다 또 장식용으로 깃털을 붙이기도 하였습니다. 로마 병사는 적이 오고 있음을 알게 되면 방패를 들고 이 모자나 투구를 쓴 뒤 칼을 쥐고 싸움터로 돌진합니다. 그렇다면 투구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투구의 영적인 의미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머리, 곧 지성과 두뇌와 지혜와 사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과 감각과 정서와 욕망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살펴보았습니다 어떻게 대적이 이러한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를 공격하려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어떤 특별한 면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듣게 됩니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몸의 지적인 부분인 지성과 이해에 관한 주의입니다. 영적 전쟁 속에서 구원의 투구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전체 전쟁에서 전략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적 마귀는 흔히 그리스도인이 싸움 전체를 포기하고 싶어하도록 할 만큼 피로와 권태감을 일으킴으로써 우리를 공격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사단의 전쟁 전략 가운데 하나는 상대를 피로하게 하고 지치게 하여 모든 전쟁 자체와 그 결과에 대해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갈라디아서 69절을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낙심이라는 말은 활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기운을 잃어 버려서 하고자 의욕이 꺾이는 상황을 말합니다. 신자의 신앙 생활에서 사단이 끊임 없이 공격하는 것이 활력을 상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 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하고, 의욕을 꺾어 버리며, 기운을 잃어버려 활력을 잃어버린 신앙 생활을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오랜 신앙 생활로 인하여 이제 익숙해져서 그렇다고 여깁니다. 처음 교회 생활에서 재미를 느끼고 활력과 기운이 넘치는 사람들이 교회 생활이 익숙해지고 예배가 익숙하고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익숙해져서 재미가 없어져서 그렇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익숙해지면 재미나 흥미를 잃게 되고 더 이상 어떤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활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활력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충족시키기 위한 재미와 흥미로 신앙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활력을 잃어버리고 교회가 재미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세상 것들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 일에는 그러한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새로운 차를 사면 그 차를 운전할 때 흥미롭고 재미있고 기분이 좋고 운전하고자 하는 의욕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조금만 익숙해 지면 그 흥미와 활력과 기분 좋음은 쉬 사라지고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집을 사도 그렇고 새로운 직장이나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오래 지속되는 모든 것과 오래 소유한 모든 것에 권태감을 느끼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을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일에 권태감이나 피로감으로 활력과 기운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오래된 것에 대하여 느끼는 권태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단의 전략인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에 신앙 생활에 너무나 익숙해짐으로 이하여 활력이나 기운이나 즐거움이나 열심이 식어지는 것은 사단이 이기고 있는 증거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 자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으며, 신앙 생활을 하되 지치지 않습니다. 마음이 무감각하거나 무미 건조한 예배나 기도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자처럼 언제나 에너지가 있으며, 하나님을 위하여 언제나 변함없는 열심을 품고 살아갑니다. 갈라디아서 69절에서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데 포기하다는 것은 잡았던 줄을 놓는 것을 말합니다.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을 붙잡고 사는 생활에서 놓아 버리며, 말씀을 붙잡고 사는 것에서 놓아 버리며, 순종과 헌신의 삶을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놓고 세상으로 돌아가며, 자신의 옛 삶으로 돌아가버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단의 전략에 의해서 영적 전쟁에서 패하거나 또는 싸움에서 도망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단의 전략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사단은 신자들에게 이 싸움이 정말 끝이 없구나를 느끼게 하며, 모든 영적인 수고와 노력이 헛되고 쓸데없다고 느끼도록 공격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서 후서 312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안에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는다고 합니다. 바울의 이 말은 외부적인 박해를 의미하지만 그것 또한 마귀에 의해서 복음 훼방하며 말씀을 대적하는 일들을 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게 하며, 의심과 불신으로 이끄는 일들을 사단의 주요 전략으로 신자들을 무너뜨리게 하는 공격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할 뿐만 아니라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록하여 보낸 서신입니다. 히브리서 1038절을 보면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않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뒤로 물러 가다는 말은 움츠리다 라는 뜻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동작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으며, 뒷걸음 치려고 하는 상태입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유대교에서 자라왔던 유대인들로 유대교에 아주 익숙한 그리스도인들 입니다. 이들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잠시 동안 밝은 빛을 보았고 새로운 믿음 안에서 행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들의 동포인 유대인에게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오랜 역사에 대한 배반자로서 간주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이방인들에게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또한 이들은 재산도 빼앗겼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믿음을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이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 왔는지에 대하여 히브리서 1034절을 보면 이들은 갇힌 자를 동정하고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이들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이 지속될 때에 이들은 움츠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단은 지치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권태감으로 공격합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설교나 가르침을 통해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자기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왕국을 세운다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오신다는 어떤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모든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히 절망하였으며 그들 중 일부는 유대교로 되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유대교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믿음을 택한 데 너무 성급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절망한 그리스도인들이 히브리사람들에게 쓴 히브리서의 배경입니다. 이들은 결국 자기들이 참된 종교를 믿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의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옛날을 생각하기 시작하였으며,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성전 예배나 제사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모든 전쟁을 포기해 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런 영적 전쟁은 목회자를 흔들어 놓게 하는데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던 디모데 목사님 또한 이러한 영적 전쟁에서 지쳐가며, 힘을 잃어가고 있었음을 봅니다. 디모데서는 바울이 사랑하는 영적 아들이자 목회자인 디모데 목사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디모데후서 16-7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안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생각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이것이 불일 듯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디모데는 지쳐 있고, 힘에 겨워하고 있으며, 열정이 식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와 영적 전쟁에서 마귀의 전략이 지속적으로 지치게 하는 것이며, 경건 생활이 헛되고 쓸데없다고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쟁에서 디모데는 상처를 입고 있고 그의 마음은 두려움에 빠졌으며 낙담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다음 절을 보면 디모데서 후서 1 8절에서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히 바울을 부끄러워하며 복음을 부끄러워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나 상황에서 바울의 권면은 다시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 듯 일어나게 하며, 두려워하지 말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구원의 투구의 필요성이며, 우리가 반드시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할 이유입니다. 그럼 이제 구원의 투구에 대한 좀더 깊은 내용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8절을 보면 바울은 우리가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라고 합니다. 여기서 구원의 소망의 투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게 되는 것은 구원의 투구란 우리가 구원됨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의 소망을 가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좀더 살펴보면 로마서 1310-11절에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의 구원은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내가 다가 가고 있고 또 나에게 오고 있는 즉 우리의 구원이 믿었을 때보다 더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우리에게 어떠한 일을 일으키는가 하면 고린도전서 1532절을 보면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 합니다. 이 말이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바울이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운 것입니까? 그는 왜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 라는 삶을 거부하며 사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사람의 방법대로 살지 않고 믿음의 방법 대로 방식대로 사는 것입니까? 바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기 때문이며 이 때가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망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6-17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데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이 낡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육체가 쇠약해 지고 우리의 이 땅의 삶이 점점 어려워져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속사람을 위하여 살며 이 속 사람이 날로 새로워짐 때문이어야 합니다. 참된 신자의 삶은 겉 사람을 위한 삶이 아니며, 오고 있는 영광을 바라보는 속 사람이 날로 새로워짐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알고 확신하는 것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하나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지치게 하며, 낙심하게 하고자 하며, 소망을 포기하며, 돌아서게 하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이며, 끝까지 소망을 붙들며, 주님이 오실 것이며, 우리가 죄 없는 몸으로 변화될 것을 믿고 견딜 것입니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는 이것을 보게 하는데 다음 절인 고린도후서 418절을 보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즉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기다리며 소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잠깐이며,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이것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이전 보다 더욱 이것들이 가까이 왔음을 알고 끝까지 인내하며 참고 기다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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