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 대하여 입니다. 욥은 그의 인생에서 다섯 가지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깁니다. 먼저는
그는 하루에 자신의 소유물들을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둘째로는 그는 자신의 열명의 자녀들을 잃어버립니다. 그것도 그가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잃어버린 그날 열명의 자녀들이 다 죽은 것입니다. 세번째는 그는 그의 건강을 잃어버려 병든 몸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그리고
네번째로 그는 자신의 아내로부터 버림을 당하며, 저주를 당합니다. 욥기
2장 9절을 보면 그의 아내가 욥에게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기 2장 9절을 보면 욥의 아내는 욥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는가?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고 합니다. 욥의 아내가 어떤 마음의
상태인지는 정확이 알 수 없습니다. 그녀는 욥과 동일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자신의 소유물이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제 하루 아침에
거부에서 거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또한 그녀는 하루 아침에 자신의 열명의 자녀가 함께 죽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럴 때 대부분은 이성을 상실하게 되게 됩니다. 그래서 하고 이성
없는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을 욥의 아내인 자신만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남편인 욥도 함께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자신의
남편은 온 몸이 종기가 나서 고통을 당하고 병중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함께 위로하지는
못할 망정 그녀는 자신의 남편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그리고 나가 죽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욥은 자신의
아내마저 잃어버리고 아내에게 버림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잃게 되는 것은 모든 소유를 잃고, 자식을 잃고, 건강을 잃은 그를 위로하러 온 세명의 친구들을 잃게
됩니다. 친구들을 잃는 과정이 욥기서의 대부분의 내용입니다. 욥기의
대부분의 내용들은 바로 욥을 위로 하러 왔다가, 오히려 욥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친구들과의 논쟁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욥기 6장의 내용은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 라는 사람의 첫 번째 말 이후에 그의 말에 대한 욥의 반박에 대한 내용입니다. 욥의 친구 가운데 첫 번째로 말문을 연 엘리바스는 욥을 책망하며 욥을 정죄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으로는 다른 일로는 욥이 이런 엄청난 재앙을 일순간에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욥이 당한 이 재앙은 누가 보던지 하나님의 진노요 징계로 밖에 여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엘리바스만이 아니라 나머지 욥의 친구들 조차도 욥을 책망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유는 욥에게 죄가 있기 전에는 이런 일들이 욥에게 일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친구들의 비난에 맞서 욥은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주장을 철회하지 않고 유지하며 친구들의 주장과 맞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러한 친구와의 논쟁 가운데 욥이 느끼는 그의
친구들에 대한 마음입니다. 욥기 6장 14절을 보면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욥이 피곤한 자라고 말하는 것은
욥 자신을 지칭해서 하는 말입니다. 피곤하다는 것은 낙담하거나 절망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욥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욥은 그의 인생가운데 일순간에 만난 재앙, 즉 자신의 수 많은 재산이 삽시간에 그의 인생을 떠나는 것을 맛보았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열 자녀를 한 순간에
모두 잃어버리는 슬픔을 당하게 되므로 그는 낙담하였고 절망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를 그의
벗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고 하는 것입니다. 14절에서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저버린 자라는 표현은 욥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져버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욥기 6장 10절을 보면 자신이 모든 것을 잃어 버렸을 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는 고통 가운데서도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으며, 기뻐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의 말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으며 그분을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6절을 다시
보면 이 말씀에 대한 이해는 낙심한 자 즉 욥이 비록 또는 행여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그만 둘 지라도 라는 의미로 자신의 친구들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 자신이 행여 하나님을 잊었을지라도 그의 친구들은 여전히 욥을 이해하고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모습에서 욥의 친구들에 대한 실망이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친구들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들이 경험할 수 없는 큰 어려움 속에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친구들은 그를 위로하며 함께 슬퍼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은 욥을 비난하며 책망하며 정죄함으로
그를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욥의 실망감입니다. 14절에 욥이 그의 친구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단순히 측은히 여기는 동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다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라는 말은 은혜라는 말로 해석이 됩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란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무조건적 헌신이며 사랑입니다. 세상의 법칙에서 강자는 강자의 권리를 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생존의 법칙인 것이 세상입니다. 그렇기에 약자는 항상 도태될 수 밖에 없고 강자만이 살아남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쓰든 강자가 되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강자를 원하고 약자를 조롱하며
패배자라고 놀리며 비웃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논리이며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다릅니다. 성경은
은혜의 원리를 강조합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신앙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강자가
약자를 향한 자발적 충성과 헌신과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데 어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충성과 헌신에는 어떠한 조건이 없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백성이기 때문이십니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들이 서로를 대하는 자세와 원리에서도 동일하게 요구됩니다. 먼저 신명기 22장 1-2절을 보면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을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리라고 합니다. 또한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주라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네 형제가 네게서 멀 때에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고 그에게
돌려 주라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그 모든 비용을 내가 지불하는 것입니다. 내가 형제의 짐승을 돌보는 책임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은 네가 그를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즉 그 짐승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때에도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었으니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절인 신명기 22장 3-4절을 보면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라고 합니다. 율법에서 형제의 잃어버린 짐승을 내가 만나면 찾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을
모르는 짐승을 만나도 주인이 올 때까지 두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하면 형제이기 때문이며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헤세드를 적용시켜야 합니다. 누가 무엇을 해주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나를 잘 대접하기 때문에 내가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의 어떤 친밀함이나 성향이 같기 때문에 사랑하고 돕는 것은 세상적 사랑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도 그렇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마 5장 46-47절을 보면 신자는 그런 이유로 인해 서로를 사랑하거나 섬기지 않습니다. 성도에게는 헤세드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높은 체하며, 스스로 잘난
체 하며, 스스로 권위를 가져 남들 위에 서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높은데 두지 않고 스스로 낮아지며, 다른 이들을 높이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낮은 우리를 높이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고아와 같은 우리들을 세상에서 불러 내어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교회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돌보며, 격려하며, 위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에 대한 정죄와 판단과 다툼은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거센 풍랑과 같은 세상에서 함께 의지하며, 위로함으로 힘을
얻게 하는 믿음의 동역자로 서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서로
더 잘 살겠다고 경쟁하는 경쟁자들이 아니라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유업으로 물려 받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형제와 자매가 된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가족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은 하나님이 보이신 헤세드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발적으로 섬기며 자발적으로 사랑합니다. 억지로도 아니며 마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이유는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 헤세드를 경험한 자이기 때문에 그 헤세드를 우리의 형제에게 돌리는
것일 뿐입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형제로써의 대우이며 형제로써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욥의 친구들은 신실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기 6장 15절입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습니다. 14절에서 그는 그의 친구들을 친구들이라고 호칭합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나의 형제들이라고 바꾸어 부릅니다. 이것은 그가 느꼈던
친밀감이 어떠한지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는 그의 친구들을 형제들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친구인 형제들은 그를 배신합니다. 본문에서 성실치 않다
라는 말은 믿을 수 없다는 의미와 함께 속이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왜 욥이 그의 형제라고 여기는 자들에게
이런 감정이 드는가 하면 예전 욥이 재앙을 당하기 이전에 자신을 대하던 그들과 지금의 그들은 전혀 다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욥은 속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신뢰할 말한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형제처럼 함께 지내며 서로 돕고 사랑했던 그들이 자신이 어려움에 처하자
멀리하는 이중적 모습에서 욥은 절망하는 것이며 배신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이중적 모습을 표현한 것이 바로 시냇물입니다. 왜 욥이 형제로 여겼던 자들의 배신을 시냇물로 표현하는가 하면 이 시냇물은 항구적인 시냇물이 아니라 와디라는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시냇물이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시냇물이 마름 같고 개울물의 잦음 갔다는 말은
비에 일시적으로 생겼다가 또한 곧 말라버리는 와디 같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더욱 풍성하게 표현한 것이 16절부터입니다. 얼음이 녹아 흙탕물이 흐릅니다. 따뜻하면 그 시냇물은 마르고 더우면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그것을 쫓던 자들이 결국 그것을 바라다 찾지 못하고 죽는 것과 같이 와디는 그것을 찾는 자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것과
같이 그의 친구들은 이처럼 자신을 속이는 자라는 것입니다. 헤세드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헤세드는
상황에 따라 바뀌지 않습니다. 형편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거나 어떠한 조건으로 베푸는 충성과 헌신과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헤세드는
무조건적이며 자발적인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형제의 고통과 고난을 함께하지 않고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그들은 끊임없이 정죄할 뿐입니다. 마치
남의 고통을 즐기듯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그들은 처음부터 헤세드의 관계 가운데
욥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세드가 품고 있는 약자를 향한 자발적 헌신과 충성과 사랑은 꼭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마음이며 자세입니다. 그를
위해 함께 안타까워하며 슬퍼하며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욥기 6장 22절과 23절을 보면 욥이 그의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이 욥의 말에서 욥이 정말로 그의 형제들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들의 위로입니다. 자신을 이해하는 마음이며 아끼고 사랑하는 그들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욥이 그의 친구들에게 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분들을 보면 그들이 원하는 것이 꼭
물질 만은 아님을 압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따뜻한 위로 말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여전히 당신을 지지하며 당신 편임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 모임 우리는 이런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해타산적이 아닌 진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서로를 아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한 지체임을
잊지 마십시오. 서로 헤세드라는 관계 속에 부름 받았으며 그 책임과 의무를 서로에게 다해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의 관계입니다.
주일말씀
2024.10.10 10:40
성도가 성도를 대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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