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주일말씀
2024.10.30 10:16

오 행복한 자여

YC
조회 수 10038 추천 수 0 댓글 0

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xNZb4xbWAWs


시편 11절을 보면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첫 번째 문장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라는 말씀인데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 있는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는 복이 이미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한글 성경에도 분명히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복을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복을 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복이 이미 있는 사람 즉 복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원문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복 있는 이라는 단어는 아쉐르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누군가가 면밀한 연구나 관찰을 통하여 발견되어진 것을 말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것으로 감탄사로 주로 사용됩니다. 그 뜻은 오 복이여! 또는 오 행복이여! 라는 의미입니다. 즉 복 있는 이라는 것은 이미 복을 받아 나타난 어떤 상황을 본 후에 그 받은 복을 보며 감탄하여 내 뱉게 되는 탄성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 있는 사람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이며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복을 받아 누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관찰하며 조사한 후에 그 놀라움에 감탄을 발하는 것이 1절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라는 말이 감탄적 의미를 살려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오 행복한 자여!라는 것입니다. 즉 시편 1편은 행복한 자가 어떤 자인가 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복된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하고 찾고자 하는 자는 바로 그 행복한 자가 어떠한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행복을 찾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행복한 자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복있는 자와 대비가 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 세 부류가 복 있는 자의 대비로써 등장하기 때문에 이 시를 읽는 자들은 이들이 복 없는 자임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행복하지 않은 자들이라는 사실 또한 직감하게 됩니다. 시인이 복된 자의 대비로써 설명하고자 하는 자들을 보면 그 정의 되는 이름들로 이미 그들이 어떠한 자들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그 명칭들은 악인들과 죄인들과 오만한 자들 입니다. 이 세 부류는 각기 세 개의 다른 행동들로 정의 되어지는데 악인의 꾀와 죄인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입니다.

이 세 부류의 설명은 행복한 자가 왜 행복한 자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대비한 것입니다. 복된 자의 대비로써 이들은 각각이 서로 다른 자들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동일한 내용 속에 들어 있는 자입니다.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는 한 의미입니다. 본문에서의 의미는 하나님을 비웃으며 조롱하며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2절을 통하여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시편 1 2절을 보면 한글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원문에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라고 번역이 될 수 있는데 그러나 행복한 자는 어떠한 자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가 행복한 자인 것은 그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시편 11절을 보면 그렇다면 1절에서 나오는 이들 즉 불행한 자들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으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악인들과 죄인들과 오만한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복을 이미 누리며 행복한 자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1절에서 세 부류를 말하고 있음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악인이며 둘째는 죄인이며 셋째는 오만한 자입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부류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서 나열한 존재들입니다. 모두는 하나의 동일한 상태 속에 있음이 발견되는데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나 그분에게 대하여 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악인이며 죄인이며 오만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1절에서 행복한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다고 합니다. 이것은 각기 다른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점증적인 하나님 없는 삶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악인의 꾀란 충고나 조언을 의미하며 죄인의 길에 서다란 머무름을 그리고 오만자의 자리에 앉다란 거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거역하며 불신하라는 충고나 조언을 듣고 그 안에 머물며 결국에는 그 안에 살게 되는 것이 불행한 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한 자는 이미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거역하라는 거부하라는 신뢰를 저버리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유혹되거나 미혹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머물며 생각하거나 그것을 묵상하거나 그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아예 그 자리에 거주하여 고착 상태에 빠져 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발견한 행복한 자는 이런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발견하여 그분을 만난 자들이기에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미 그들은 확신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을 신뢰함 가운데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행복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난 자들입니까? 그렇다면 바로 여러분들이 행복한 자들입니다. 시인이 발견하며 감탄에 맞이 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여러분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 할 것은 1절에서 시인이 진정한 행복자가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안에 사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 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복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분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며 그분을 따를 수 있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을 거역하며 배반하며 의도적으로 범죄하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며 심지어는 비방하며 비웃으며 조롱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여 그렇고 그분의 말씀에 대하여 그렇고 그분의 의지에 대하여 그렇습니다. 이들 각각이 행하는 내용에서 악인의 꾀와 죄인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모든 행위는 점진적인 죄의 오염과 죄로 인한 심령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악인의 꾀는 충고나 조언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죄인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그 뜻을 거역하는 사는 곳에 머무름이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은 이제 그분의 말씀을 비방하며 그분을 조롱하며 비웃은 자리에 앉아 거주하는 지경에 이른 것을 의미합니다. 시인이 말하고자 참으로 복된 자들은 이들과 다른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는 것이며 이들과 연합하지 않는 것 자체가 참으로 복이며 행복한 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에 대하여 성경은 인간의 행복은 오직 한 근원으로부터 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111절 말씀을 보면 성경에서 한번 등장하는 내용인데 바로 하나님을 복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복을 받은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원문을 직역한 것입니다. 복을 받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바울이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만일 하나님께서 복을 받으셨다면 하나님께 복을 주는 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이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베푸는 은혜의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보다 높은 자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보다 높은 자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가에 대하여 바울의 의도는 복의 근원자 라는 의미로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송 중에 복의 근원 강림하사 라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또한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복이란 하나님의 속성으로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하나님께서는 이 행복 가운데 있으며, 행복으로 충만하시기 때문에 오직 그분으로부터 인간은 행복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불행은 어떤 것인가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데 불행을 성경은 저주로 표현합니다. 복이 행복을 말하며, 불행은 저주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3절을 보면 바울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가 저주의 의미로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끊어지는 것 즉 하나님과 분리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 즉 분리됨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건져 내셨는데 바로 우리의 저주를 친히 담당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하나님으로 버림 즉 끊어짐을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절규를 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버리심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시편 11절을 보면 시인은 이것이 왜 행복이며 복된 것인가? 하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하는데 그것은 누구나 타락한 인간은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자이며 악인이며 죄인이며 오만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그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분리된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그러한 자리에서 그곳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자들이었는데 그들이 복음이라는 복된 소식을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그 자리에서 벗어나 이제 그러한 삶을 살지 아니하고 구별된 삶을 살수 있으며 하나님을 찾으며 그분과 함께 하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 2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얻었다는 말은 현재형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사건인 것입니다. 또한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미래형입니다. 그리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라는 말은 현재 완료형으로 이미 이루어진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음으로 값없이 얻어진 은혜입니다. 시편을 기록한 시인은 이미 그러한 사실을 연구하고 살펴보고 조사한 결과 알아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참으로 복이 있는 자 또는 참으로 행복자의 모습이 다가 아닙니다. 1절의 내용은 오히려 소극적인 면에서 나타나는 행복한자의 모습이라면 2절은 적극적인 면에서의 행복한 자가 누리는 복이며 행복입니다. 2절을 보면 2절에는 그러나 라는 접속사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인은 대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을 받은 자는 행복한 자는 악인이나 죄인이나 오만자처럼 살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그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복을 받은 자의 적극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오직 이라는 말은 맹세에 자주 나타난 단어인데 결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마음에 정하여서 혹은 뜻을 다하여서 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복된 사람은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을 사랑하며 지키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즐거워한다는 말은 무엇인가를 행하여 가지거나 하는 것을 간절히 원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 단어적 의미에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말은 그냥 편하게 말씀을 듣고 좋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복된 사람은 단순히 말씀을 즐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생활에 윤택을 주는 좋은 명언이나 고사성어를 읽듯이 자신의 지성을 위하여 그리고 지적 유희를 하듯이 말씀을 대한 다는 것이 아니라 복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정한 사람입니다. 말씀에 마음이 정하였다는 것은 말씀의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씀을 사모하며 열망하며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읽고 싶고 알고 싶고 그대로 살고 싶은 간절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즐거워하다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참 좋은 말씀이야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정말 언제 들어도 기분 좋게 하는 말이야 하는 차원의 자기 중심적, 만족적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생명의 말씀이기에 붙들며 의지하며 전 인생을 거는 삶을 사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복 있는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다른 어떤 것들에 의해 쉽게 포기되어지고 쉽게 잊혀지고 뒤로 밀쳐지는 말씀에 대하는 자세가 아니라 그 어떤 것에도 양보되지 않고 그 어떤 상황에도 포기되어지지 않고 오직 말씀을 읽고 아는 것에 온 힘을 기울이며 또한 그것을 삶에 실천하는 것에 최우선을 두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이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성경만 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모든 일상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알고 싶고 깨닫고 싶고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가운데 우리의 모든 의미 없이 보내는 시간들을 절약하고 아끼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일에 배우는 일에 읽고 사는 일에 힘을 다하자는 뜻입니다. 사실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떤지는 우리가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앉아서 텔레비젼을 보거나 뉴스를 보거나 잡담을 하거나 공상을 하거나 하는 시간에 말씀을 위한 시간이 밀리며 뒤쳐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복된 삶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것은 후에 참으로 부끄러운 삶이었으며 의미 없는 삶인 것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2절의 하반절은 이어서 복 있는 자, 행복한 자는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자는 마음을 정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기 위하여 바라며 원하며 소망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주야로 묵상한다는 말은 밤과 낮의 구별이 없이 어느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 올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묵상한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중얼거린다는 뜻입니다. 중얼거린다는 것은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나타나는 의미는 입으로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중얼거리며 무엇을 중얼거립니까? 우리가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며 계속해서 입에 달라 붙도록 하는 것은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즉 무엇인가 입으로 계속해서 말한다는 의미는 말씀을 암송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즉 복이 있는 사람은 말씀을 가지기를 사모하고 열망해서 그것을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그 말씀을 암송하여 머리 속에 그리고 가슴 속에 새겨 넣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만난 자 말씀을 경험한 자가 가지는 고백이며 대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기 위하여 열열히 사모하는 마음이나 또한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읆조리며 암송하는 이유는 그 말씀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 만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없는 자는 심판 가운데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이 왜 복이 있는가? 왜 행복한 자인가? 왜냐하면 그는 생명의 길에 서 있고 어둠에 있지 않음이며 하나님의 회중 가운데 있으며 죄악의 길에서 떠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참으로 복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복 있는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수
1082 주일말씀 서로 다른 집을 짓고 있는 자들의 경우 2024.12.04 6238
1081 로마서 강해 179강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심 로마서 9장 23절 2024.11.27 8921
1080 주일말씀 하나님은 나를 위해 어떻게 일하시는가 2024.11.27 8335
1079 로마서 강해 178강 자신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로마서 9장 22-23절 2024.11.19 7612
1078 주일말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 2024.11.19 9626
1077 로마서 강해 177강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한 로마서 9장 21절 2024.11.14 8558
1076 주일말씀 하나님은 나의 부요함이라 2024.11.14 9123
1075 로마서 강해 176강 네가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로마서 9장 20절 2024.11.06 7347
1074 주일말씀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4.11.06 10048
1073 로마서 강해 175강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심 로마서 9장 17-18절 2024.10.30 7265
» 주일말씀 오 행복한 자여 2024.10.30 10038
1071 로마서 강해 174강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 로마서 9장 14-16절 2024.10.23 7761
1070 주일말씀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2024.10.23 9520
1069 로마서 강해 173강 택하심을 따라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 로마서 9장 11절 2024.10.16 6737
1068 주일말씀 삶을 망치는 조급함 2024.10.16 8746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74 Next
/ 74

차타누가 열린교회 CHATTANOOGA YEOLIN PRESBYTERIAN CHURCH
1622 HICKORY VALLEY RD. CHATTANOOGA, TN 37421
담임 : 박경호 목사 Ph : 423-645-7910 Email : pkrain1@gmail.com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