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D99G2lyHgKc
시편 1편 1절을 보면 시인이
찾아낸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않으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소극적 의미에서의 복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또 다른 적극적인
모습이 2절에 나타나는데 2절을 보면 그는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굳은 결심과 다짐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 다짐과 결심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즐거워하다라는 말은 감정적인 의미가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가지기를 원하는 것을 위하여 기꺼이 어떠한 행위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기 원하여 기꺼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 행위는
그 다음에 나오는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는 것에서 그것이 무엇인지가 나타납니다. 주야로 묵상한다는
말은 중얼거리다 라는 말로 기억하며 암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익숙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시인은 어째서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를 복 있는자 또는 행복한 자라고 여기게 되는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무엇을
가져다 주길래 시인은 여호와의 율법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을 복된 사람으로 그리고 행복한 사람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복되다고 하는 것은 무병 장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또한
자식이 잘되거나 사업이 잘되어 걱정 근심이 없는 상태가 복되며 행복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시인은
그런 것에서 복을 찾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무엇을 본 것일까요? 시편 119편을 보겠습니다. 시편 119편
103-104절을 보면 [시 119:103-104]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How sweet are your words to my taste, sweeter than honey to my mouth! I gain
understanding from your precepts; therefore I hate every wrong path. 또
다른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맛이 달다고 합니다. 그 단 맛이 꿀보다 더하다고 합니다. 원문의 의미를 좀더 직역하자면
얼마나 달고 단고 주의 말씀이여 라는 의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달콤하고 달콤해서 감탄을
하고 있으며 가장 단 꿀에 비유하여 그 단 맛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시인은 주의 말씀을 꿀과 비교하며 비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인에게 주의 말씀이 이렇게 단 이유가 무엇입니까? 104절을 보면 주의 법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명령이나 교훈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들과 교훈들이
자신을 명철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명철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이해력 혹은 분별력으로 번역 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분별력과 이해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분별력이나 이해력은 어디에 사용되는 것입니까? 무엇인가를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선택할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제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무엇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무엇을 행하며 그 결과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하여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얻은 분별력과 이해력으로 가지게 된 것은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무엇에 대하여 입니까? 모든 거짓된 행위에 대하여 입니다. 시인은 이제 싫어하고 미워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과 이해력이 생긴 것입니다. 시인이 이제 모든 거짓된 행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시인의 고백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거짓된 행위를 미워하는
것은 타락한 죄인이 심성안에서는 저절로 얻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모든 거짓된
행위들은 윤리나 도덕적 차원이 아니라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시인은 더 나아가 이러한 주의 말씀이 자신에게 인생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다음절인 시편 119편 105-106절을 보면 주의 말씀이 자신의 발의 등이라고 하며 자신의 길의 빛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며 이끄시는 인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등이라
빛이라는 비유는 이 세상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의 말씀에 대하여 뜻에 대하여 그분의 계획에 대하여 어두움 가운데 있다는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다. 모든 인간도 하나님에
대하여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다. 요한 복음 1장 5절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1장 5절을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어두움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비추어질 때에야 만 인간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보게 되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이것이 얼마나 자신에게 달콤한 것이며 맛있는 것인지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결국 시인은 마지막으로
맹세하고 굳게 정합니다. 무엇에 대하여 인가는 주의 의로운 규례에 대하여 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만난 자 말씀을 경험한 자가 가지는 고백이며 대하는 자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1장에서 시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절은 또 다른 차원에서 복 있는 자가 왜 복이 있는 자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3절
보겠습니다.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That
person is like a tree planted by streams of water, which yields its fruit in
season and whose leaf does not wither- whatever they do prospers.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저는 이 가리키는 것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입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며 그 행사가 다 형통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복 있는 사람을 나무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는 인생이 그가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며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거나 암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늘 1절과 2절을
근거로 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시인은 말하고자 하는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을 복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인이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 것을 복으로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고 이해하는 것이 복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3절은 복 있는 자가 어떻게
그러한 일들이 가능하며 어떻게 풍성한 잎과 열매를 맺으며 형통한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먼저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고 비유하는데 심은 나무란 말은 옮겨져 심겨진 나무란 의미입니다. 원래부터 시냇가에 있던 나무가 아닙니다. 옮겨진 나무인데 어디로부터
옮겨진 것인지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추론해 보건대 아마도 척박한 땅으로부터 옮겨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누가 이 나무를 옮겼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으나 우리는 문맥상 하나님께서 이 나무를 옮기셨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만약 이 나무가 척박한 땅에 그대로 놓여 있었더라면 이 나무는 열매는 물론 그 잎사귀도 시들었을 것이며 곧
말라 비틀어져 죽었을 것입니다. 그럴 운명이던 이 나무를 하나님께서는 옮겨 놓으신 것입니다. 이 나무가 소생하도록 그리고 나무의 본분을 다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이 나무를 옮겨 놓으신 것입니다. 시인이 복 있는 자를 복되다고 여기는 것은 그는 옮겨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척박한 땅에서 옮겨져 그가 지어진 창조 목적에 합당하게 열매를 맺으며 풍성한 생명력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은 나무에 대한 의미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 또한
옮겨진 자들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누구에 의해 그리고 어떻게 옮겨지게 된 자들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하나님에 의해 옮겨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흘러 넘치는 생수를 마심으로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풍성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이것은 저절로 되어진 일이거나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지혜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에 의해서 발생된 사건이며 그렇기에 이것은 은혜라는 것입니다.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왜 신자는 복된 자인가? 왜
예수를 믿는 자는 복된 자인가? 왜 예배하며 찬양하는 자는 복 있는 자이며 행복한 자인가? 바로 옮겨 심겨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옮기시지
않으셨다면 여러분들은 여전히 세상에 속한 자라로서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에
사는 어떤 자들과 같이 예수 믿는 것이 불쌍한 것이고 쓸모 없는 것이며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일이라고 치부할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바르게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우리가 옮겨 심겨진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무에게 있어서 시절을 좇아 나는 열매와 잎사귀는 그
나무가 살아 있다는 건강하다는 생명력이 있다는 증거 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이 있으며 더욱 신실한 신자로써의 삶을 살고자 하는 애씀이 있다면 거룩을 향한 부르짖음과 애통함이 있다면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옮겨 심겨진 나무입니까? 여러분
안에 예수 안에서 얻어지는 생수가 흘러 넘치고 있습니까? 그 물을 공급받기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까? 그가 주시는 능력으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옮겨 심겨진 나무는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복이 있는 자가 아닐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 합니다. 4절은 복이 없는 악인의 경에 대한 비유입니다. [시 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4 Not so the wicked! They are like chaff that
the wind blows away.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복 있는 자와
같지 않습니다.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합니다. 겨라는
말은 왕겨를 말하는데 벼의 겉 껍질입니다. 속을 빼고 난 후에 겉 껍질은 키질을 할 때 날려 보냅니다. 즉 바람에 의해서 날려가는 왕겨와 같다는 말인데 그 의미는 무가치하며 공허하며 쓸모 없는 것을 뜻합니다. 악인의 삶이 무가치 하며 쓸모 없으며 공허하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살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할
수도 있으며 사람들이 인정해 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삶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의 인생의 주인이신 분 앞에서의 그의 삶은 무의미하며 무가치하며
쓸모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위해서 살지 않았으며 살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 8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이 없는 자 하나님께서 무관심한 자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고 합니다. 바람을 심과 광풍을 거둔다는 것은 거둘 수 없는, 잡을 수 없는
헛된 것을 심으며, 그 심은 것의 결과는 자신에게 심히 불행한 것을 거두게 될 뿐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시편 78편 33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을 보내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들은 출애굽 후에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거역함의 죄에 대한 대가로 그들은 광야에서 지내다 광야에서 죽게 된
자들로 출애굽한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의
대가로 하나님은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날들의 주인이십니다. 오늘은 우리의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날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날을 허락하셔서 오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일의 주인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이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십니다. 여기서 보내게 라는 말은 소비하다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공허하고 헛된 삶을 소비하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게으르게 산다는 말도 아닙니다.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누구보다 애를 쓰고 온 힘을 다하여 인생을 살지만 그의 인생은 헛되게 소비되게 하며, 헛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며 그를 위하여 사는 것만이 인생을 헛되이
소비하지 않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기뻐하며,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자는 오직 옮겨 심겨진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진 자들 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으며 그분과 교통함으로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5절은
결론입니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생을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으로 채웠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또한 이들은 의인의 회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됩니다. 시편 1편 5-6절을 보면 [시 1:5-6]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Therefore
the wicked will not stand in the judgment, nor sinners in the assembly of the
righteous. For the Lord watches over the way of the righteous, but the way of
the wicked leads to destruction. 6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접속사로 이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길을 인정하신다고 하십니다. 인정하신 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다는 뜻입니다. 즉 의인의 삶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삶인 것입니다. 그분을 인정하며 시인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여 더욱
알기 원합니다. 그들은 심겨진 나무로써 그분으로 오는 힘을 공급받으므로 그분을 닮은 열매를 맺으며 그분의
생명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삶을 삽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계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은 그 길이 하나님 없는 길이기에 망할 수 밖에 없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의인의 모임에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라면 스스로가 복된 자리에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옮겨진 자리에 있음으로 우리가 열매 맺을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떠남으로 혹은 신앙의 게으름으로 그 열매 맺는 일이나 풍성함에서 멀어지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자리에 있으며 그 관계 속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행복한 자 복된 자는 결국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 사는 자들입니다. 지금
생각하고 고민하셔야 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시겠습니까? 무엇으로 하나님을 깊이 아실 계획이십니까? 무엇으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실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