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MUZd5liDOYU
누가복음에 나타난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단순히 우리가 읽은 본문 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을 향하여 가르치신 모든 말씀의 결론에 해당 하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좀더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이르는 내용들을 먼저
이해하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의 내용들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5장 1-2절을 보면 [마 5: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Now when Jesus saw the crowds, he went up
on a mountainside and sat down. His disciples came to him, and he began to
teach them.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오르사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
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라고 시작합니다. 이후부터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산상 수훈이라고
합니다. 산상 수훈이란 산 위에서 후대에 주어진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내용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덟 가지 복인 팔복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지켜야할 삶의 윤리와
신앙에 대한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말씀 가운데 결론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어떻게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설수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속의 열망은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에 부는 갈대와 같이 이리
저리 흔들리며 넘어지고 쓰러지는 신앙이 아니라 요동하지 않는 든든한 신앙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부분에 집중에서 여러분들이 본문을 살펴보셔야 합니다. 누가복음 6장 46절을
보면 [눅 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Why do you call me, 'Lord, Lord,' and do not do what I say?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여 주여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부르면서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 하신 것이라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게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주여 주여라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부른다는 의미가 단회적인 아닌 지속적으로 그렇게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주여 주여 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그냥 호칭인가 아니면 그것이 그들의
신앙적 고백이 담겨 있는 부름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주여 주여 라는 단어는 퀴리에 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아무에게나 불리우는 말이 아닙니다. 주여 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생님 즉 디다스칼로스 라고 부르는 명칭과 확연히 다른 명칭입니다. 이 단어는
신적 능력을 가진 분으로써의 인정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자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혹은 적어도 신적 대리자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여
주여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실상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주는 충격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부름이 진실한
신앙의 고백과 상관 없이도 충분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너희가 나를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면 너희들이 나를 신적 존재로 믿고 있다면 너희가 내 말을
따라 살아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너희 입과 행동이 불일치 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좀더 생각해 보면 둘 중의 하나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마음이 없다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가운데 말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큰 것은 우리 또한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지속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고 말하는 것에 의미를 담지 않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정말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다면 저렇게 살면 안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은
신자로써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애쓰는데도 불구하고 넘어지며 쓰러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이고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죄악 된 행위를 하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주님이라는 호칭은 단순히 호칭이 아닙니다. 이 부름은 우리의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진실한 신앙의 고백적 부름이 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의미 없는 호칭은 잘못된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주님 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냐가 왜 중요한가 하면 그 부름이 어떤 의미인가에 따라 정 반대의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절인 누가복음 6장 47절을 보면 [눅 6: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As for everyone who comes to me and hears my
words and puts them into practice, I will show you what they are like. 예수님께서 보이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47절은 한 개의 주동사와 3개의 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의미는 이렇습니다. 내게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게 나아오고 내 말을 듣고 내 말을 행하는 자가 누구인지 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나아오고 듣고 행하는 이라는 말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나아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아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들은 것을 실천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 모두가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지속적인
것입니다. 한번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단지 한번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이고자 하시는 사람은 지속적인 사람입니다. 중단 없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찾는 사람이며 그의 말씀을 사모해서 끊임없이 그분 앞에 나오는 자이며 그리고 그 들은 말씀을 어떻게든 실천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입니다. 이 사람을 예수님은 보여 주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다음절인 누가복음 6장 48절을
보면 [눅 6: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They are like a man building a
house, who dug down deep and laid the foundation on rock. When a flood came,
the torrent struck that house but could not shake it, because it was well
built. 이 사람은 집을 짓고 있습니다. 아마도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아마도 자신이 거할 집을 짓고 있는 듯 합니다. 집을 짓는데 계속해서 집을
짓고 있는 상태입니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닌 계속해서 자신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설명하는 말이 땅을 팠다고 합니다. 한글 성경에는 깊이
라는 단어가 형용사로 등장하지만 본문에서는 동사형 입니다. 의미는 이 사람이 땅을 팠고 깊이 팠고 라는
의밉니다. 땅을 깊이 깊이 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의
주초 즉 기초 혹은 기반을 반석 위에 두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좀더 본문에 가깝게 의역하면 이 사람은 집을 짓고 있는데 땅을
아주 깊고 깊게 반석이 보일 때까지 땅을 팠고 결국 반석 위에다 그 기초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집을 지을 때 땅을 그냥 판 것이 아닙니다. 반석을 발견할 때까지 판 것입니다. 계속해서 파 내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반석을 발견하였고
그 위에 집의 기초를 둔 것입니다. 집을 짓는 사람이 이렇게 집을 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알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기후가 바뀌어 홍수가 나서 큰
물줄기가 그 집을 덮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앞을 내다 보는 사람이요 주의 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이런 행동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길래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까? 이 사람이 집을 짓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 나아오며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어떠한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것은 우리 영혼의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영혼을 위해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깊고 깊이 땅을 판다는 것입니다. 땅을 파는 이유는 반석을 발견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로마서 9:33절에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3장 11절을 보면 [고전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For no one can lay any
foundation other than the one already laid, which is Jesus Christ.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터로 하여 이 사람은 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집을 짓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초로 자신의 인생과 영혼의 집을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부르는 주여 주여는 의미 없는 그리고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지 않은 그런 부름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건 고백이고 자신의 삶 전체를 건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를
자신의 인생의 기초 삼고 있습니다. 예수가 이 사람의 근거이고 예수를 의지하며 예수를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인생을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등장하는 이 사람은 아직 집을 완성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진행입니다. 그러나 과거형으로 이미 마쳐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깊고 깊이 땅을 판 것입니다. 그리고 반석을 발견하고 그 위에
자신의 집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이것은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위에 집을 세워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기초로 세워진 집은 인생의 어떠한 어려움과 시험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너지기는
커녕 흔들리지도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 신앙과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다는
것과 홍수의 큰 물이 그 집에 부딪히지 않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홍수의 큰 물이 덮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이 마치 위태해
보일 수 있지만 결국 그 집은 무너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49절을 보면 [눅
6: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But the one who hears my words and does not put them into
practice is like a man who built a house on the ground without a foundation.
The moment the torrent struck that house, it collapsed and its destruction was
complete." 이 사람이 앞의 사람과 같은 것은 예수님께 나아오고 그의 말씀을 듣는 행위는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앞의 사람과 다른 것은
행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예수님께 옵니다. 그리고
그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이 기초가 아닌 자신이 그의 인생의 근거요 기초가 되어
집을 짓습니다. 이 사람이 지은 집은 집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겉에서
보면 같은 집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은 깊고 깊이 땅을 파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반석을 찾지도 않고 그것에 기초를 두지도 않습니다. 이 사람의
기초는 땅 위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오지만 이것은 흥미일 뿐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지만 그것은 단지 의미 없는 행동일 뿐입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아직 자신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지 않을뿐더러 그분을 신뢰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말씀에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생명의 주인으로 내 인생의 주권자로 인정함이 없이 자신의 마음대로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의지에 기초해서 집을 지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예수님을 여전히 주여 주여 부르지만 아직도 예수님께 굴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보다 자신의 감정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대로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없이 쉽게 포기하고 버려 버리며 여전히 자신이 주인 되어 살아갑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 만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생명이기에 따르겠다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여 주여 부르는 자들은 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나의 감정이
어떠하든지 나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분이 말씀하시며 그 말씀에 자신을 던지며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말씀 위에 우리 자신을 세우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너집니다. 신앙이 무너지고
인생이 무너지고 우리의 삶이 무너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 여러분의 기초를 두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