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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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에의 시작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공생애라는 말은 공적인 삶이라는 말로써 예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야로써의 보내심을 받은 일들을 시작하며 사신 기간을 말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이 땅의 모든 순간이 메시야로써의 시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이제 백성들 가운데 메시야로써 자신을 드러내시어 사역하시는 기간을 공생애라고 부릅니다.
이 기간의 시작은 세례 요한으로부터의 세례로 시작됩니다. 마태복음에서의 진술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임하셨다고 합니다. 또한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4장 1절을 보면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Then Jesus was led by the Spirit into the wilderness to
be tempted by the devil. 그때 즉 세례를 받으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셔서 광야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습니다. 이 때 마귀가 와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이 시험은 세번에 걸쳐서
진행되며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심으로 마귀는 떠나고 천사들이 예수님을 수종드는 것으로 이 이야기가 끝을 맺게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익숙한 말씀이 주는
위험은 본문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지나침으로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종종 실패한다는데 있습니다. 본문을 이해하는 여러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을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이해하여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마귀의 시험을 이겨야
함을 강조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또는 세번의 시험을 모두 말씀으로 이기셨기 때문에 사단의 시험을 이기려면
예수님처럼 말씀으로만 이길 수 있다는 시험 승리의 방법으로 본문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좀더 심하게 나가면
마귀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40일의 금식을 통한 능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것은 금식의 능력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40일 금식을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영성의 반열에 올라 자랑스럽게 명함에 40일 금식 몇 번 이라는 내용을 삽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두는
다 부족한 이해입니다.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에 부분만을 본 것입니다. 그럼 본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 해석하며 무엇을 교훈 받아야 합니까? 예수님은 어떤 일에든지 신자의 모범이 되시고 유일한 선생이시기에 예수님이 행하신 대로 따라야 합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에 우선 여러분들이 가져야 하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어떻게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 이 질문이 가능한가 하면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은
절대로 악한 자가 시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서 1장
13절을 보면 [약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When
tempted, no one should say, "God is tempting me." For God cannot be
tempted by evil, nor does he tempt anyone;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실 뿐만 아니라 친히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말은 예수님께서는 지금 신성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오직 인성으로 성육신 하신
몸으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 마태복음 4장
1절부터의 내용은 우리 주님이 인간으로서 시험을 받으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에서의 시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4장 1절에 그때에란 말로 두 사건이 연속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의도적으로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장 1절에 그때에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입니다.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푸시는 요한에게 나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세례를 받으시려 하십니다. 이에 요한은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에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며 정중히 거절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마태복음 3장 14-15절을 보면 [마 3:14-15]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But John tried to deter him,
saying, "I need to be baptized by you, and do you come to me?" Jesus
replied, "Let it be so now; it is proper for us to do thi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Then John consented. 이 말씀 속에 예수님께서 굳이 세례를 받으시는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요한이 베푸시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요한 또한 예수님께 세례를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세례 받으러 오십니까? 라면서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예수님은 본인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 말씀을 이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락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받으시는 세례는 결코 회개의 세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분은 다른 의미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요한이 서로가 아는 이 세례는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함으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면 이것은 단순한 세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의
세례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모든 의를 이루는 세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의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의 라는 단어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건 또는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자의 상태 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세례가 모든 의를 이룸 즉 성취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건에 놓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무를 이행하려는 자로써의 상태에 놓이려 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세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구원할 자인 인간이 스스로 되시며 인간이심을
선언하신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상태에 놓이신 것입니다. 세례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인간이심을 선언하심과 동시에 인간 예수로써
하나님께 철저한 순종과 복종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이 그들 통하여 얻게 될 의를 성취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요구하신 모든 의를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 의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좀 보겠습니다. 로마서 3장 21-22절을 보면 [롬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But now apart from the law the righteousness of God has been made
known, to which the Law and the Prophets testify. This righteousness is given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to all who believe.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Jew and Gentile,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에 대하여 입니다. 이 의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은 율법으로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조건이나 상태에 결코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지나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이 너무나 극심하기 때문임을
아셔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을 보면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For
all who rely on the works of the law are under a curse, as it is written:
"Cursed is everyone who does not continue to do everything written in the
Book of the Law."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이 주는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시기 위하여 모든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어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가 받은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받으시고 그 저주에서 끊어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다른 의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의로움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할 수 없는 그것 즉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그분이 인간이 되심을 통하여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법 아래에 놓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인간 예수로 받으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를 자신의 결정과
권한으로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에 의해서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지만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요한의 세례에 순종하여 받으심으로 그분이 이제 인간으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광야에 성령에 이끌려 가심과 40일 금식과 마귀의 시험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을 보면 [마 4:2-3]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After fasting forty days and forty nights, he was hungry. The
tempter came to him and said, "If you are the Son of God, tell these
stones to become bread." 4장 1절 이하의 사건은 별개의 사건으로 보면 안 되는 이유가 예수님의 세례가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이 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는 자로써의 준비이기 때문에 그 후에 광야에서의 시험과 내용도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대표가 되신 사건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같이 이제 마지막 아담으로 모든 인류의 대표로써 하나님 앞에 선 것입니다. 그렇기에 광야의
시험도 저절로 되어진 사건이 아니라 인류의 대표로서 맞이하시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시험의 장소가 광야인 것입니다.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40일 이라는 시간적 의미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공간과 시간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 본문의 시험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또 다른 힌트는 예수님께서 시험하는
자가 세 번 시험을 할 때에 대답하신 세 번의 내용들이 모두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을 보면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Jesus
answered, "It is written: 'Man shall not live on bread alone, but on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시험에 대하여 기록되었으되 라는 말로 성경을 인용하시는데 이는 신명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후로 두번의 시험에도 동일하게 신명기의 말씀을 가지고 시험을 물리치시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해 봅시다. 40일의
금식, 광야, 신명기의 내용,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이제 인간으로써 율법의 의를 이루어야 함. 무엇을
생각해 낼 수가 있습니까?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험의 내용이 출애굽 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 받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에 그들은 이제 그 언약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그분의 백성됨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40년간 광야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시험에서 그들은 실패합니다. 예수님의 시험의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영적 이스라엘이 되셔서 그 일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분이 하나님
백성됨에 실패한 역사를 돌려 놓으시며 회복하실 분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은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에 대한 내용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예수님이 행하신 대로 우리가 따르거나 본받아서는 안 되는 본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메시야가 되겠다는 의미와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의미는 그분의 메시야 사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순종과 철저한 복종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증명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의 예수님 됨이 기적과 이적과 표적으로 되어지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메시야로써의
증표로써 나타나는 것일 뿐 사실은 그분의 순종과 복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이하의 내용에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적과 이적을 통하여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광야의 시험은 영적 이스라엘로 인류의 대표자로써 인간이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신적 능력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철저한 순종과 복종이며 자신을 낮추심으로 이기셨음을 아셔야 합니다. 첫
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이 돌들을 명하여 떡 덩이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40일을 주리신 인간 예수님의
본능을 자극하며 본성을 움직이게 하려는 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의 첫 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4장 3절을 보면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The tempter came to
him and said, "If you are the Son of God, tell these stones to become
bread."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은 그런 능력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하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지금 몹시 주려 계십니다. 그렇기에
본능은 음식을 요구하며 감각은 식욕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배고픔도
못 느끼실 것이다 라는 생각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인간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신적 능력을 스스로 제한 계신 상태인 것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과 육체적
피로와 주림을 모두 경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들을 떡 덩이가
되라고 합니다. 이 시험의 요구는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돌들을 명하여 떡 덩이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하는 자가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고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혹은 하나님의 능력을 요구하여 그 능력을 힘입어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심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심으로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마땅한 인간의 본문임을 믿으시며
따름으로 증명하신 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대표로써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땅에 그분의 자녀로써
어떻게 자신을 증명하시며 어떻게 사는 것이 신자된 자의 삶인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라는 요구에 무엇으로 우리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치 주린
배를 채우듯이 내 욕구와 필요를 채우며 원하는 것을 소유하거나 하는 것으로 증명하려는 것은 주님이 하신 증명의 방식이 아닙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만 자신을 증명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유함도
건강함도 잘됨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만 내가 살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대로 순종하며 삶으로만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하는 자의 시험에서 마태복음 4장 5-6절을 보면 [마 4:5-6]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Then the devil took him to
the holy city and had him stand on the highest point of the temple. "If
you are the Son of God," he said, "throw yourself down. For it is
written: "'He will command his angels concerning you, and they will lift
you up in their hands, so that you will not strike your foot against a
stone.'" 여전히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라는 말로 증명해
보라고 합니다.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너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호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항상 지키심을 신뢰하심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림으로 하나님이
정말 나를 보호하시며 지키시는 분이신가를 시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마귀의 시험은 오늘날도 동일하게
신자들에게 존재합니다. 우리에게 시험하는 자는 끊임없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나님의 자녀냐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네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어떻게 너를 보호하지 않는가 어떻게 이런 상황에 너를 방치하는가? 네가 이러한 어려움에 처할 수 있는가? 너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는 질문으로 우리의 믿음을 흔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인생의 어려움과 두려움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때로는 힘든 인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신자됨의 증명은 수많은 경우 높아지는 경우 보다는 낮아 짐으로 겸손함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8-9절을
보면 [고후 4: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We are hard pressed on
every side, but not crushed; perplexed, but not in despair; persecuted, but not
abandoned; struck down, but not destroyed. 이 말씀처럼 신자는 이러한 상황에도 절망하지 않으며
오직 순종과 복종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와 확신으로만 증명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