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주일말씀
2025.02.25 17:08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두 사람 1

YC
조회 수 3166 추천 수 0 댓글 0

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ujowjPvWJSs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비유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라고 이름 붙여진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세리입니다. 내용은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그 사람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의 종교 의식상 가장 경건하다고 여겨지던 사람과 가장 죄인이라고 여겨지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극단의 인물들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하시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9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To some who were confident of their own righteousness and looked down on everyone else, Jesus told this parable: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복수를 사용하여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는 다는 말은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문장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이 구절에 주 동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자들입니다. 즉 어떤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두 개의 분사가 사용되었는데 첫째는 자기들 의롭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믿다 라는 단어는 확신한다는 뜻인데 이 확신은 그 근거를 가진 확신입니다. 이들은 맹목적인 자신의 생각으로 스스로 의롭고 확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스스로 그렇게 확신할 말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증거에 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둘째로는 첫번째의 자신들만 어떠한 근거로 인해서 의롭다고 확신을 하는 상태의 어떤 사람들인 동시에 이들은 자신들의 의롭다 함을 근거로 자신들 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멸시 하다 라는 말의 문법적 의미는 계속해서 다른 이들을 멸시하는 자세와 태도로 삶을 사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은 그는 자신들을 의롭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법적으로 보면 믿다 라는 단어는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부터 현재까지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그들 스스로 의롭다 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을 추론하여 얻는 그들 스스로에 대한 의롭다 함의 확신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에 자신들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습관이 배여 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비유의 핵심적 내용입니다. 자신들이 의롭다는 것에 확신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 오늘 비유의 청중입니다. 누가 이 비유의 내용을 들어야 하면 바로 자신들의 의로움에 확신에 찬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명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의 정체는 그 다음 구절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누가복음 1810절을 보면 [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Two men went up to the temple to pray, one a Pharisee and the other a tax collector.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고 말씀합니다. 이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라고 합니다. 이들 중에 누가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리새인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 이들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는데 있어서도 조금의 망설임이나 의심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들은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책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게 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 아닙니다. 11절에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가지는 신앙 생활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11절을 보면 [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The Pharisee stood by himself and prayed: 'God, I thank you that I am not like other people-robbers, evildoers, adulterers-or even like this tax collector. 먼저 자신은 토색하지 않지 않았다고 합니다. 토색이란 약탈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거나 훔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불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불의란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남기는 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을 속이거나 거짓으로 자신의 유익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간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적인 욕망에 휘둘려 여인을 보고 탐욕을 품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 의로운 자라는 확신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기에 더한 종교적 헌신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812절을 보면 [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I fast twice a week and give a tenth of all I get.'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번 그렇게 해본 것이 아닙니다 원문의 의미는 지금껏 그렇게 매주 마다 반복적으로 해온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일년에 한번은 기본적으로 금식을 해야 합니다. 언제인가 하면 대 속죄일에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금식입니다. 그런데 더욱 종교적인 헌신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자원하여 하였는데 월요일과 목요일이었습니다. 이때 스스로 자원하여 금식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을 살면서 매주 마다 이틀씩 금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주만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대단한 종교적 헌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그것 만이 아니라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합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수입의 십 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십일조는 소득의 십일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십일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입의 십일조는 물론이고 이에 더하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 가운데 십일조를 따로 구별하고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헌신과 충성됨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종교적 헌신된 행위를 보면 스스로 의로운 자라고 확신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의로운 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셔야 할 그의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여기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의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18[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I tell you that this man, rather than the other, went home justified before God. For all those who exalt themselves will be humbled, and those who humble themselves will be exalted."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 즉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갔다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비교급으로 번역하여 이 사람 즉 세리가 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 더 좋습니다.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으로 간 것입니다. 문제는 왜 바리새인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감히 따라 올 수 없을 만큼의 노력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받으시는 분이 그것은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다. 무엇이 이 사람의 종교적 헌신과 열심이 의미 없는 것 혹은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이 사람의 종교적 행위가 잘못된 것입니까? 토색, 불의, 간음 일주일의 두번의 금식. 소유하고 모든 것 가운데 십일조를 드리는 것 이런 행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떠한 종교적 행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잘못된 의로움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 사람에 대한 첫 번째 설명이 자신을 의롭다고 확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누가복음 18 9절 말씀을 보면 [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To some who were confident of their own righteousness and looked down on everyone else, Jesus told this parable: 누가 누구에게 의롭다고 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자기에게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확신에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된 확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확신의 근거는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롭게 된다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유별나고 특별하며 다른 사람들이 따라 올 수 없는 종교적 행위를 한 것은 스스로를 의롭게 되기 위해서 입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 의로울 수 없다고 합니다. 의로움은 우리의 어떤 종교적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2 16절을 보면 [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째서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 질 수 없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답변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열심 있는 사람이 바리새인의 행위 보다 더 열심이 있는 자는 율법을 지킴으로 스스로 의로워 질 수 없는가? 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지기 위해서는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하며 그의 인생 내내 완전히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서 210절을 보면 [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For whoever keeps the whole law and yet stumbles at just one point is guilty of breaking all of it.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용에 주의해야 합니다. 온 율법 즉 모든 율법을 잘 지켜왔습니다. 하나도 예외 없이 지켜 왔습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다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모든 율법을 범한 자의 죄와 동일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없는 인간이 처한 비참한 영적 상태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상태로는 절대로 의로움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식을 통한 구원이신 것입니다. 로마서 83절을 보면 [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For what the law was powerless to do because it was weakened by the flesh, God did by sending his own Son in the likeness of sinful flesh to be a sin offering. And so he condemned sin in the flesh,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God did 입니다. 율법이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못합니까? 율법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서 의롭게 되는 일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의롭게 되지 못하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즉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신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어 죄 없으신 그분의 몸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우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왜 바리새인이 경건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의롭다함을 받지 못했는가 하면 그는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얻은 것은 우리가 행한 종교적 행위의 결과로 얻은 것이 아니며, 우리의 구원이 계속해서 유효한 것이 내가 하고 있는 행위와 내가 할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유효함은 오직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는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의로운 자가 될 뿐만 아니라 나의 구원이 거기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나의 구원은 오직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붙들고 있으며, 우리의 생명 다하는 날까지 그분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 열심인 신자들이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 생활에 심취해서 자신이 의로운 줄 착각하며 스스로 자기 확신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매일의 경건 생활과 일정한 기도 생활과 헌금 생활과 말씀을 읽으며 공부하며 훈련하는 이런 모든 과정이 자신을 의롭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위로도 결코 의롭다고 여김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의로움은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행위는 의로워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의로운 자로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된 사람들이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경건한 삶을 보며 스스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자기 확신에 빠지면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적 행위는 당연한 것이지 자신을 자랑하거나 드러낼 일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수
1112 주일말씀 하나님의 시험의 방식 2025.03.18 52
1111 주일말씀 어떻게 인내하라는 것인가? 2025.03.12 1942
1110 로마서 강해 189강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분명한 요구 로마서 10장 5절 2025.03.05 1654
1109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두 사람 2 2025.03.05 2298
1108 로마서 강해 188강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로마서 10장 4절 2025.02.25 1636
» 주일말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두 사람 1 2025.02.25 3166
1106 로마서 강해 187강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씀 로마서 10장 3절 2025.02.19 1868
1105 주일말씀 생베와 새 포도주 2025.02.19 3141
1104 주일말씀 산상 설교 2025.02.12 3561
1103 로마서 강해 185강 헛된 열심 로마서 10장 1-2절 2025.02.04 2695
1102 주일말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2025.02.04 4249
1101 로마서 강해 184강 하나님께 구하는 바 로마서 10장 1-2절 2025.01.28 3524
1100 주일말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2025.01.28 4342
1099 로마서 강해 183강 행위를 의지함과 부딪힐 돌에 부딫힘 로마서 9장 32-33절 2025.01.22 2067
1098 주일말씀 자신을 비우셨다는 말의 의미 2025.01.22 5448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75 Next
/ 75

차타누가 열린교회 CHATTANOOGA YEOLIN PRESBYTERIAN CHURCH
1622 HICKORY VALLEY RD. CHATTANOOGA, TN 37421
담임 : 박경호 목사 Ph : 423-645-7910 Email : pkrain1@gmail.com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