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n82_vYV0lxw
지난 시간에 이어서 두 번째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
비유의 대상이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자기 확신에 빠진 사람들이 어떤 신앙 형태를 보이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확신하는 것은 그들의 종교적 행위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토색과 불의 그리고 간음하지 않았음을 자랑합니다. 또한 일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 두 번에 걸쳐서 자발적인 금식을 합니다. 그리고 소득의 십일조 만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헌신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다른 어떤 사람들 보다도 더욱 종교적이고
헌신적인 삶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문제는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인하여 의로울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보면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우리의 어떠한 신앙적 행위의 결과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스스로 행위를 통하여 의롭다고 자기 확신에 빠진 자들의 악한 모습은
자기 우월감에 빠져서 타인을 무시하며 깔본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멸시한다는 말에서 이 사람은 자신과
같은 부류 이외의 나머지라는 표현을 써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깔봅니다. 이것이 이들의 몸에 밴 습관적인
행동임을 또한 말씀 드렸습니다. 이들의 이런 교만과 오만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 18장 11절을 보면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The Pharisee stood by
himself and prayed: 'God, I thank you that I am not like other people-robbers,
evildoers, adulterers-or even like this tax collector. 저들과 같지 않고 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함을 통하여 신앙이 상대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이 비교의
도구가 되어 내가 상대보다 더 낳은 신앙을 소유하고 있음이 자랑이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신앙적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그 사람보다 더욱 사랑하거나 위하거나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오히려 절대적입니다. 누구와 평가해서 좋으면 사랑 받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등급이 있으며 구원에 등급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에 대하여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사람들을 현혹하여 육신적인 충성을 이끌어내고 사람들을 미혹하여
헛된 열심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로마서 3장
21-22절을 보면 [롬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But now apart from the law the righteousness of God has been made
known, to which the Law and the Prophets testify. This righteousness is given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to all who believe.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Jew and Gentile,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으로 우리는 의롭게
됩니다.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비교해서 사랑하거나 평가해서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유하게 창조하셨을 뿐더러 고유한 우리의 특성과 성품을 아시며 그 특성과 성품을 인정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야고보서 2장 9절을 보면 [약
2: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But if you show favoritism, you sin and are convicted by the law as
lawbreakers.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죄를 받습니다. 무엇으로부터 정죄를 받습니까? 율법으로부터 정죄를 받습니다. 즉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차별함으로 스스로 율법을 어긴 것이며, 그는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정죄 받아 마땅한 자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비유에 등장하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을
보면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But the tax collector stood at a
distance. He would not even look up to heaven, but beat his breast and said,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바리새인과 함께 성전에
올라갔던 세리입니다. 세리는 말 그대로 그의 직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세리는 로마의 식민지 하에 있는 자신의 민족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자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매국노와 같은 부류이었으며 거기에 더하여 정한 세금 이외에 자신들의 몫으로 세금을 거두었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으며 사람들은 이들을 종교적으로 죄인으로 분류했습니다. 종교적으로
신앙적으로 죄인으로 분류되었으며 사람들에게 무시와 멸시를 받았던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왔습니다.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은 앞서 기도했던 바리새인의 기도와 비교가 됩니다. 13절에 세리의 기도의 자세를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먼저 멀리 서서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도하러 올라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눈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가 기도하러
성전을 향하여 올 때부터 지속적으로 그러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려는
의도조차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 세리로 하여금 스스로 그의 눈을 막아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하고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게 합니까? 그의 마음에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까? 그는 지금 하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전에 올라올
필요가 없습니다. 성전은 기도의 처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9장 46절을 보면 [눅 19: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It is written," he said to them, "'My
house will be a house of prayer'; but you have made it 'a den of
robbers.'"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구약을 통하여 성전을 완공한
후에 솔로몬이 기도하는 내용 가운데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이렇게 간구합니다. 열왕기상 8장 30절을 보면 [왕상 8:30]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Hear the supplication of your servant and of your people Israel
when they pray toward this place. Hear from heaven, your dwelling place, and
when you hear, forgive. 솔로몬은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들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신 곳은 하늘입니다. 그래서 세리가 눈을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의 사고 속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며 이곳에서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란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마지막 간구의 내용을 보면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합니다. 사하여 달라는 것은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세리는 이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세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러 온 것입니다. 다시 누가복음 18장 13절을
보면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But the tax collector stood at a
distance. He would not even look up to heaven, but beat his breast and said,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그 다음의 내용을
보면 이 부분이 더욱 확실해 집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한 세리가 하는 행동은 다만 가슴을 친다는
것입니다. 가슴을 치는 행위는 무엇인가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스스로에 대한 질타입니다. 가슴을 치는 행위는 몇 번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가슴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리가 성전에 올라오면서 하는 행위 전체를 그려 보십시오.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의도적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또한 자신의 삶을 지켜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믿음 때문에 그는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가슴을 칩니다. 올라오며 서서 가슴을 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습니다. 감히 얼굴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통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슬픔 때문에 가슴을 치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는 바로 다음 말씀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말합니다. 그가
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김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그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는 말은 단지 자신을 측은히 여겨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죄었기에 이해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자신이 죄임에도 받아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당신과 화목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다 라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청원인데 이 청원이 뜻하는 의미가 화목하게 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단순한 죄의 용서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기에 하나님과 분리가 되었으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과 분리가
되며 원수가 된 상태의 그의 삶은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며 하나님을 떠난 어떤 인간도
진정한 평안함이나 안정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과 화목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죄만 사함 받는 차원에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자는 결코 하나님 편에 서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자는 그의 죄 된 본성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은 세상의 법을
어기고 남을 죽이고 빼앗는 일을 하는 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 어떤 선도할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믿지
않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 모든 행위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행위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4절을 보면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I tell you that this man, rather than the other, went home
justified before God. For all those who exalt themselves will be humbled, and
those who humble themselves will be exalted." 이는
이 비유의 결론입니다. 누가 더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고 집으로 갔습니까? 바로 세리입니다. 그 다음 내용은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바리새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에 근거한 의로움에 도취되어 자신의 의를 자랑하며 스스로
높아집니다. 그의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요구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압니다.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자신이 분리 되었음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요구합니다. 하나님 밖에 자신을
죄가 주는 절망에서 건져내실 분이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기에 그 어떤 것 보다도 하나님을 요구하며
요청하며 그분과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높여 하나님이 구하지 않는 자와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고 오직 하나님 없으면 안 되는 인생인줄 알고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을 구하는 자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자세는 세리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계십니까?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전혀 관련 없이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임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며 그분이 계심을 그리고 예배를 받고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세리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아셔야 합니다. 그분은 저와 여러분의 삶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을 정도의 하나님에 대한 존재의식을 가지셔야 합니다. 라틴어로 코람데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라는 말입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높이며 사는 것이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세리의
삶이 그와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만 원합니다 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을 통하여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본문에서 등장하는 두 사람을 통하여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중에 중요한 하나는 신앙은 위치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에 보면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The Pharisee stood by
himself and prayed: 'God, I thank you that I am not like other people-robbers,
evildoers, adulterers-or even like this tax collector.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서서 라는 말은 수동형으로 그 스스로에 의해서 세워졌다라는 표현입니다. 즉 그의 몸은 그 스스로가 원하는 곳에 따로 세워졌습니다. 그곳에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따로 라는 말에서 그리고 그의 기도 내용을 통하여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성전 가까이에서 서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상태로 기도하고 있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종 기도할 때 눈에 띄는 장소를 찾아 기도했던 그들의 습관을 보면 그는 성전가까이에서 기도한 것이 확실합니다. 반면에 13절에 세리는 어떻게 합니까? 누가복음 18장 13절을
보면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But the tax collector stood at a
distance. He would not even look up to heaven, but beat his breast and said,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멀리 서서입니다. 서서라는 단어는 바리새인과 같은 단어지만 능동형입니다. 세리는 스스로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가 결정한 것은 멀리 서는 것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처럼 스스로를 어디에 놓을까를 고민하지 않고 가능한 먼 곳에 선 것입니다. 멀리 서서라는 말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어디를 근거로 해서 입니까? 바로
성전을 기점으로 해서입니다. 왜 입니까? 그는 스스로 죄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의 선 곳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성전 가까이 그것도 스스로 마땅히 여기며 그곳에 서서 기도합니다.
성전 가까이라는 의미는 하나님 가까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바리새인보다는 하나님께 가까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육체가 머문 위치가 이들의 신앙이 좋고 나쁨 혹은 바르고 바르지 못함을 대변해 주지 않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종교적인 행위가 남보다 뛰어나고 말씀을 더 많이 알고 기도 생활을 더 많이 하고 봉사와
헌신과 열심이 남보다 뛰어나다 해도 그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다.
위치적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간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마음은 세상에 있고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원하고 높아지기를 원한다면 그 그는
사실 하나님께 멀리 있는 것입니다. 세리는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방향을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비록 몸은 멀리 있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보다 더 경건하거나 더 의로운 삶을 살지는 못하지만 그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몸은 하나님께 가까운 곳에 있지만 그의 마음과 얼굴은 세상을 향하여 있기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여러분이 서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향하는 방향입니다. 여러분들의 얼굴이 향하는 방향입니다. 어디를 보고 계십니까? 무엇을 마음에 품고 계십니까? 하나님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