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앙 생활의 필수요소 중 하나인 인내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앙 덕목 중에 하나로서 인내를 강조하고 있으며, 인내하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 인내에 대하여 세 가지의 내용을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첫째로는 성경이 말하는 인내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단어적 의미를 통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둘째는 성경이 말하는 인내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하여 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는 어떻게 인내하라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첫번째로 인내라는 어휘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헬라어의 인내라는 단어는 훼포모네 라는 단어로 두 단어의 합성어 입니다 휘포라는 전치사와 메노 라는 동사가 함께 합하여 만들어진 단어인데 휘포 라는 뜻은 무엇 아래에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메노 라는 동사는 남다, 머물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단어를 합치게 되면 어디 아래에 머물다 라는 뜻으로 견디다,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다, 확고부동하게 있다, 버티다 라는 뜻이 됩니다. 이 단어는 주로 군사적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전쟁의 싸움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고 견고하게 서서 버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인내라는 어휘적 의미를 볼 때에 성경에서 종종 이러한 단어적 의미를 포함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굳게 서서 요동하지 말고 견디라는 의미로 인내를 사용하며, 신자에게 있어서 인내의 필요성은 마치 전쟁과 같은 싸움 때에 인내를 요구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과 싸우며,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죄와 싸우는 존재입니다. 이에 대하여 두번째로 인애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면 주님께서는 인내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셨는데 누가복음 21장 17-19절을 보면 [눅 21:17-19]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앞선 구절에서는 주님께서는 부모 형제 친척들에 의해서 넘김을 받아 몇몇이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후에 가족들 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렇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유대인들로부터 모세의 율법을 멸시하며,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고, 또한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여전히 신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삶을 살아가는 방식, 일을 하고, 먹고, 입고 사는 방식은 다를 것이 없지만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고,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과 대하는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정의 함에 있어서 죄인으로 정의하며, 모든 사람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라는 관점으로 봅니다. 또한 회개하여야 할 대상으로 보며,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악한 것이며, 죄를 부추기며,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키는 것들로 여깁니다. 그들이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주일을 구별하며, 예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악한 일에 참여하지 않고, 불의를 눈감지 않으며, 거짓을 거부하며, 세상에 속한 것을 헛된 것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메 참된 그리스도인은 고지식하며, 완고하며, 융통성이 없으며, 독선적이라 여깁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세상의 도덕과 윤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으며, 그것들은 오히려 더러운 옷과 같은 것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지 않으면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미워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지켜 주실 것이며, 보상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끝으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얻으라는 말은 명령으로서 인내를 통하여 영혼을 얻어라 라는 것입니다. 즉 왜 인내하여야 하는가? 인내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바로 인내를 통하여 신자는 자신의 영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얻는 다는 말은 구원을 얻으며, 영생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인내는 신자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도록 이끄는 힘이며,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하여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인내가 주는 유익에 대하여 로마서 2장 6-7절을 보면 [롬 2:6-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응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영생인데 이 영생을 선물로 받을 사람들에 대하여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인데 이러한 자들은 저절로 또는 쉽게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참고 라는 것에 모든 것이 다 달려 있는 것입니다. 참고 라는 단어가 휘포모네 라는 인내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신자가 계속해서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지속적으로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하면 바로 인내로 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내의 열매가 주어지는데 바로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 인내해야 하는가? 왜 인내가 모든 신자에게 필요한가 하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인내가 신앙의 모든 것을 굳게 서게 하며, 확고부동하게 하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머물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며, 이 인내의 열매 영생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내의 열매가 영생이라고 해서 인내하면 모두가 영생에 이른다는 말은 아닙니다. 또한 인내 자체가 구원의 수단이 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 받은 자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인내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세번째로 가장 중요한 어떻게 인내할 수 있으며, 인내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히브리서 12장 1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 12: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이 구절은 우리가 할 일을 꼭 집어내서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이 주어진 대상인 히브리서의 청중들의 경우에 이들은 낙심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으로 이들은 낙심하여 매우 비참한 가운데 있는 신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낙심의 원인은 큰 시련을 당하고 있었고, 고통의 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박해를 받고, 오해를 받고, 시련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강탈 당해야만 하였기에 당시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버리고, 굴복해버릴 만큼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서신서가 바로 히브리서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들에게 인간적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버려야 할 것을 말하고, 또한 마땅이 운명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에 대하여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버려야 할 것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말씀을 따라 사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로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을 방해하며, 넘어지게 하거나, 성장하거나, 믿음으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방해물들이 바로 모든 무거운 것입니다. 또한 얽매이기 쉬운 죄란 단지 죄를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근원으로 탐심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 것에 얽매여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고, 신앙 성장을 더디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발목을 잡는 것들을 벗어 버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우리가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당한 이란 표현의 의미는 운명지워진 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모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마치 경주장에서 경주하는 운동 선수와 같이 달음질을 하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시합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선수에게 있어서 탁월한 운동신경도 필요하고, 뛰어난 기술도 필요하지만 지속적으로 선수 생활을 유지하며,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인내로써 경주를 하라는 것입니다. 인내라는 단어가 전쟁에서 군인들이 싸움을 하는 것에 사용되는 단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견디다, 굳건하게 서다, 확고부동하다 라는 뜻을 가지며, 무엇 아래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경주와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인내인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포기하고 싶어했으며, 많은 이들이 믿음에서 파선하며, 믿음에서 떠나 버리고자 하는 유혹을 가졌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인내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히 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힘들어 하는 신자들에게 영적인 침체와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신자들에게 또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지만 지쳐가는 신자들에게 예수를 바라보자고 독려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라고 할 때에 우리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바라보아야 하는데 모든 믿음의 주시라는 것입니다. 이 주라는 말은 믿음의 창시자라는 뜻이며, 창시자라는 의미는 믿음을 만드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믿음의 주인이시며, 믿음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누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를 믿게 하였는가? 어떻게 내가 하나님을 믿고 알게 되었는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게 믿음을 주신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믿음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믿음의 창시자이기에 믿음의 주인께서 내게 믿음을 주셨다면 그분이 내게 주신 그 믿음을 지켜 주실 것이라 믿어야 합니다. 또한 그분은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온전하게 하신다는 의미는 완전하게 만드는 자 라는 의미입니다. 즉 주님께서 내게 믿음을 주셨다면 그 믿음을 완전하게 하실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하며, 그러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우리는 인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인내는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의 소망에서 나오며, 또한 자신의 포기하지 않는 욕구와 욕망에 대한 갈망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신자의 인내는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것이 나의 믿음을 위함이며, 나의 믿음을 완전하게 하여 나로 하여금 끝까지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세상과 죄악에서 건져내시기 위하여 그 위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당한 고난을 생각할 때에 왜 그렇게 하셔야 하셨는가 누구를 위함인가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인내할 수 있으며, 또한 그분은 그렇게 죽으심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너무나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살며, 이 땅에서의 삶에 매여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 가 하는 것에 매우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며, 삽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적인 일에 인내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여기고, 어떻게 생각할지를 염려하며, 그것 때문에 부끄러워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이나 누리는 것에 미치지 못하면 속상해 하고, 낙심이 되며,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잘못된 것이며,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라고 할 때에 그분이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의 삶에 대하여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개의치 않는다는 말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경멸하며, 멸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에 대하여 그렇게 해야하지 도리어 이 땅에서 삶에 짓눌리고 얽매여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일들에 대하여 우리의 삶의 주어진 환경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때로는 경멸하며, 멸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하여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없이 사는 것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부족하게 사는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마음이 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 대하여 그렇게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8절을 보면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누구인가 하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세상은 가치 없는 것이며, 중요하지 않으며, 받아들일만 한 곳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이 신자들이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이러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떠한 일에도 인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이 될 수 밖에 없고,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며, 바라는 것들을 바라며, 그러므로 믿음을 버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에 더하여 예수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하면 히브리서 12장 3절을 보면 히 12:3절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할 때에 그분이 내가 거역한 모든 일을 참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분께 내가 행한 모든 죄악에 대하여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내가 범한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참으신 그분께 내가 어떻게 보답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나를 주님은 여전히 참고 계시며, 순종하지 않는 나를 참으시며, 온전하지 않은 나를 참고 계십니다. 그러한 주님을 생각할 때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당하는 어려움 때문에 믿음을 포기해야 하겠습니까? 세상과 타협해야 하겠습니까? 신앙 생활을 엉터리로 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내하며, 견디고, 굳게 서서 물러서지 않고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끝까지 경주함으로 그분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인내합시다. 믿음으로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