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lovCSgewqW0
매일 매일 특별할 것이 없는 똑 같은 일상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똑 같은 반복적인 날들을 보내다 보면 우리는 우리도 모른 채 사육된
사고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들의 사고와 생각이 사육된다는 것입니다. 사육된다는
것은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매일의 반복적인 일상에 길들여져서 인생에 대하여 우리의 삶에 대하여 습관적으로
행동하고 습관적으로 반복된 삶에 학습되어 현재적 삶에 매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일상 속에서 현실에 안주하여, 현실적 삶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우리의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 주어진
일상에 노예가 되어 일상 즉 평상시의 생활 습관에 길들여진 채 인생을 보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들의 삶은 일상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일상은 다른 날들을 고대하며, 바라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주어진 일들을 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따로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는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 이 땅의 일들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8절 말씀을 보면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the
world was not worthy of them. They wandered in deserts and mountains, living in
caves and in holes in the ground.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런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하여 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할 때에 이 의미는 마치 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뛰어난 사람, 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사람들 이라는 뉘앙스를 줍니다. 저도
예전에 본문에 대한 이해가 없을 때에 이러한 의미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아주 뛰어나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을 보면 이 세상은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즉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세상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세상은 그들이 살기에 적당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세상은
불편한 잠자리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세상은 편하지 않았으며,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왜 세상은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가치가 있는 곳이 아니며, 머물 곳이 아니라고 여기게 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나는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세상은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불편한 잠자리처럼 떠나고 싶은 자리였던 것처럼 나 또한 그러한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세상에 대한 마음의 상태가 일반적으로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가지는 특별한 마음이 아닙니다. 이 땅을 살아갔던 모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오직 믿음으로 살았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자세와 태도와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향이라는 함은 우리 주님이 계신 곳을 사모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주님의 강림을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이 말씀을 함께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함은 성경을 읽으면서 이러한 말씀들이 성경의 곳곳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니 초대 교회 성도 모두가 본향을 사모하며, 우리 주님의 강림 즉 재림을 고대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매일의 반복적인 인생 속에 사육되어 일상에 매여 산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그 일상의 지배아래 산 것이 아니라 그 일상에서 건져 주실 주님을
고대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7절을 보면 [고전 1: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Therefore you do not lack any spiritual gift as
you eagerly wait for our Lord Jesus Christ to be revealed.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다린다는 말은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것으로 목을 늘리고 시선을 앞쪽으로 고정하여 바라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간절히 기다리는
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일상 속에서 일상의 일들만 생각하며 산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주님을 고대하며 산 것이며, 그분이 나타나실 것 즉 재림을
기대하며 산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고린도 교회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을
보면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But our citizenship is in heaven. And we eagerly await a Savior
from there, the Lord Jesus Christ,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일상 속에서 지쳐, 일상에 매여 사는 자들에게 너희의
시민권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비록 썩어질 육체로 말미암아 이 땅에 살고
있지만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도 아니며, 세상에 가치를 두고 세상을 위하여 사는 자도 아니며, 세상의 것을 위하여 사는 자도 아니라고 합니다. 세상은 너희의 주인도
아니며, 세상은 너희의 고향도 아니며, 세상은 너희의 나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며, 그것이
너희의 정체성이고, 너희가 가진 시민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입국할 때에 입국심사대를 앞에 두고 함께 비행기를 타고 왔던 사람들이 나뉘게 됩니다. 그들 모두가 비록
한 비행기를 타고 같은 나라에서 출발했지만 그들이 입국장에 들어설 때에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심사를 받게 됩니다. 외국인이 서야할 자리, 영주권을 받은
자들이 서야할 자리, 그리고 미국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 서야 하는 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시민권을 받은 자들이 받지 않는 질문이 있는데 미국에 어떤 이유로 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받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민권을
가진 자는 자신의 나라에 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 나라가 완전히 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로부터 오시는
자이신 우리의 구주이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라는 말은 그곳은
실재 하는 곳이며, 그곳에 우리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고린도전서 1장 7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기다린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밖을 내다 보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하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이 빌립보 교인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인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두 지평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평이란 평평한 대지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지평에
우리의 몸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자로 이 땅에서 살고 있지 않으며, 이 땅에 살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지평에 또한
살고 있습니다. 그 지평에 살게 된 것은 우리 주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그 나라 시민권자로
살고 있습니다. 아직 그 나라는 완전히 이 땅에 임하지 않았으며, 거기로부터
오시는 우리 구주이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강림, 재림이라는 말은 파루시아 라는 헬라어 입니다. 우리는 파루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그러하였음을 보게 되는데 데살로니가 1장 10절을 보면 [살전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and to wait for his Son from heaven, whom he raised from the
dead-Jesus, who rescues us from the coming wrath.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가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간절히 사모하며, 고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 즉 죽음에서 살아나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 말하니 라는 말에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간절이 기다렸습니다. 그냥 일상의 일에 매달려 살면서 시간을 때우면서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특별히 다른 일상을 보내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의 일을 하면서 기다리는데 이것은 그들의 일상이 동일하였지만 그 의미나 내용이 전혀 달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그들이 기다렸는가 하면 데살로니가 전서 1장
6절을 보면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You became imitators of us and of the
Lord, for you welcomed the message in the midst of severe suffering with the
joy given by the Holy Spirit. 너희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말씀에 적합한 자로, 말씀에 부합한 삶으로 자신들의 일상을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말씀으로 자신의 일상이 주님을 닮은 일상으로 변화하여 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닮은 자들이 되어간
것입니다. 이런 일드링 가능한 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상이 그들에게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그들이 살아내야 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원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그들은 그 고통들을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잠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만 자신들이 겪는 일이며,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주님이 오시면 세상의 모든 고통에서 자신들을 건져내시며,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믿고 바라며,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오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45절을
보면 [눅 12: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But suppose the servant says to himself, 'My master is
taking a long time in coming,' and he then begins to beat the other servants,
both men and women, and to eat and drink and get drunk.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재림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로 주신 말씀입니다. 한 종이 자신의
마음에 말하기를 나의 주인이 더디 오리라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더디 오리라 라는 말은 지체하다, 연기하다 라는 뜻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행동을 하며 거치는 것 없이 인생을 산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우리 주님의 심판을 다음
구절에서 보면 누가복음 12장 46절에 [눅
12: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The master of that servant will come on a day when he does not
expect him and at an hour he is not aware of. He will cut him to pieces and assign
him a place with the unbelievers.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라고 합니다. 생각하지
않는 날 그리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이 이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엄히 맞을 것인데 살이 찢길
정도로 맞고 잘릴 것이며, 믿지 않는 자들이 가는 곳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교회의 특징이며, 모든 교회가 소망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다 쓸 것 처럼 살아서도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7장 31절을
보면 [고전 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those who use the things of the world, as if not engrossed in them.
For this world in its present form is passing away.
바울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세상
물건을 쓰는 자는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며 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그것들에 열중하고 몰입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으며, 그것이 있어야 하며, 사용해야 하며, 그 일을 하며, 어떤 것을 경험하며, 어떤 것을 맛보아야 하며, 하는 삶으로 인생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이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곳, 죽기 전에 입어야
할 옷, 죽기 전에 먹어야 할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더 행복한 것도, 더 잘사는 것도 아닙니다. 다 의미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왜냐하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이 세상의 외형은 다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이 나라는 우리 주님과 함께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서 5장
7-8절을 보면 [약 5:7-8]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Be patient, then, brothers and sisters, until the Lord's coming.
See how the farmer waits for the land to yield its valuable crop, patiently
waiting for the autumn and spring rains. You too, be patient and stand firm,
because the Lord's coming is near.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합니다. 이는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귀한 열매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십시다. 우리 주님의 강림이 가깝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