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qKpFGKZdJGs우리는 지난 시간에 시편 42편에 대한 앞 구절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본 시를 통하여 알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으로 고난을 당하는 자신의 백성을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끄시며, 인도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우리는 고난이나 환란이나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쉽게 당황하여 먼저 피할 길을 찾고자 합니다. 이 피할
길이란 문제나 어려움에서 벗어나며 모면하는데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해결을 하나님께 원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은 즉각적인 상황의 반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내는 결코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급함은 인간의 보편적 습관이며, 불행을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적 성향은 항상 성급성을 뜁니다. 그래서
조급해 하며 하나님께서 즉각적인 상황의 반전을 이루어 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감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의 극적인 즉각적인 반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며, 어떠한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지 알고 기다리며,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섭리라고
하는데 섭리에는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가 있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면 섭리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자신의 뜻을 가지고 계시며 그 뜻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며, 보존하시고, 인도해 가시는데 이 모든 일을 섭리라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일반
섭리란, 하나님께서 그 크신 지혜로 원래 확립해 놓으신 일반적인 법칙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을
해 나가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이 세상이 운영되는 원리인 심고
거두는 법칙대로, 사람이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법칙대로 수단을 사용하여 그 목적한 바를
이루도록 하신 것을 일반 섭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 특별 섭리란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셔서 일반적인 법칙을 초월하거나 역행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해 나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특별 섭리를 기적이라고 표현합니다. 특별 섭리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셔서, 일반적인 수단들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 섭리는 아무에게나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와 그분의 백성들인 성도들에게 특별히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로 일하신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항상
특별 섭리로 일하시기를 하나님께 원하는 경향성을 가집니다. 특별히 어떤 불행으로 여겨지는 일이 우리의
인생에 들어올 때에 우리는 더욱 간절히 특별 섭리를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반 섭리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일하시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때에 특별 섭리로 일하시지만 보통은 대개 일반적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일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게으름을 피시거나, 또는
일하지 않고 쉬엄쉬엄 일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잠시도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멈추시면 온 우주가 멈추는 것입니다. 지구의 자전
활동도, 공전도 멈추고 태양도 빛나기를 멈추고 모든 것이 멈추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은 일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일하시는 쉼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께 내 자신의
문제가 다른 어떤 것들 보다 더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이기 때문에 내 문제만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또는
내가 내 방법 대로 해 달라고 하는 것은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를 모른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방법 대로 일하시며, 그 일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믿는 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믿어야 하며, 그분이 취하신 방법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든 일에는 결코 악이 있을 수 없으며, 불행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분은 선하신 분이시기에 우리 앞에 놓인 일에 대한 해답이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때와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요구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일반 법칙을 무시하면서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을 사용하여 목적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지방 어디에서 서울에
도착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와 같은 수단을 사용해야만 그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울로 가는 중간단계에 해당하는 이런 수단들을 무시하고서는 그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좋은 성적과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하고 일해야 한다는 수단이 있어야 그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신자가 당하는 고난과 역경과 신자가 당하는 고난과 역경이 그 목적과 의도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불신자의 경우에 그들이 당하는 고난과 역경은 그 목적이 심판입니다. 그들이 죄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욥기 15장 20절을 보면 [욥 15:20]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므로 All his days the wicked man
suffers torment, the ruthless man through all the years stored up for him.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다고 합니다. 일평생에 악인은 그 악한 일에 대한 보응으로 고통을 당하며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영어 성경은 좀 다르게 번역했는데 무정한 자는 그를 위해 고통을 쌓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악인이 결코 형통하지 못하며,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신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로 고난이나 역경을
당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이 고의 지은 죄에 대한 대가는 받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인생의 고난과 역경은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가 아닙니다. 또한 대가가
아닐 뿐더러 그들의 고난의 목적은 고통이 아닙니다. 성장이며, 성숙이며, 온전함이며,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온전함과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더욱 하나님의 자녀됨을 입증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편 42편은 고난
중에 시인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시편 42편 1절을 보면 [시 42:1]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For the director of music. A maskil of the Sons of
Korah.] As the deer pants for streams of water, so my soul pants for you, my
God. 하나님께서는 고난 당하는 자의 마음에 역사하사 고난 중에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소리 내어 부르짖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이 그들 중에 더욱 계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2절을 보면 [시
42: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My soul thirsts for God, for the living God. When can I go and meet
with God?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며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시며,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고자 하심 입니다. 이제 5절을 보면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Why, my soul, are you downcast? Why s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my Savior and my
God. 이 구절은 이 시를 기록한 저자가 시를 기록할 때 그의 안에 일어나고 있는
심리적 상태에 대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설명을 통하여 시인의 마음 속에 발생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5절을 보면 그의 안에 발생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현재 낙망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차
있음을 봅니다. 시인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평안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두 개의 단어로 표현되고
있는 상황 때문입니다. 낙망과 불안입니다. 이 두 개의 단어는
시인만이 아니라 신자나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며 삶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인생에서 낙망과 불안을 만난다는 것은 시련을 당하는 것이며 크나큰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함께 살펴보는 이유는 이 시인이 불신자이기 때문에
낙망이나 불안의 문제로 그의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자로써 하나님에 대하여 불성실
하거나 악해서 이러한 일들 속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때때로 경험하는 이러한 상태를 영적 침체라고 부릅니다. 영적 침체는 다양한 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범죄로 말미암아 영적인 침체를 경험하기도 하고 영적 게으름과 무관심으로 인하여
영적 침체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열심히 구하며 찾는데도 불구하고 영적 침체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있는 낙망과 불안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시인은 원수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시 42: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My tears have been
my food day and night, while people say to me all day long, "Where is your
God?" 사람들이 시인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궁금함에 근거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 말은 네 하나님이 어찌되었느냐 라는 말로 네 하나님이
아주 너를 떠나 버린 것 아니냐? 라는 의미로 너는 버림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시인의 상태를 더욱 드러내는 것이 10절 말씀입니다. 10절을 보면 [시
42: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My bones suffer mortal agony as my foes taunt me, saying to me all
day long, "Where is your God?" 여기서도 동일하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조롱하는
자들을 봅니다. 이러한 말은 시인에게 그의 뼈를 찌르는 칼이 된 것입니다. 뼈를 찌르는 칼이라는 말은 직역하면 뼈를 산산이 조각 낸다는 말입니다.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떠한 형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날카로움이나
예리함도 느껴지지 않지만 말이 살의를 띠면 사람을 죽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말이 살인을 하며 피를
흘리게 합니다. 시인은 말에 의해 지금 그의 뼈가 산산 조각 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혀를 조심하라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말은 쏟아 부으면
주어 담을 수가 없습니다. 말로 천냥 빛을 갚기도 하지만 말로 망하게도 합니다. 시인은 잔인하게 몰아붙이며 의도적으로 그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낙망과 불안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 앞에 설 때에 사람들이 하는 실수가 바로 하나님의 특별
섭리의 발동을 간절히 원하며, 원수들을 지금 무너뜨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을뿐더러 우리에게 자신을 증명하시는 수단으로 삼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인의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 이것을 극복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어떠한 일을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적 침체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문제라면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5절을 보면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Why, my soul, are you downcast?
Why s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my
Savior and my God. 그의 안에 낙망과 불안이 있습니다. 여기서 낙망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몸을 구부리는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몸을 구부리는 것은 쳐져 있는 모습입니다. 즉 풀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은 주저앉아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극단적 좌절의 모습인 것입니다. 누군가 몸을 구부린
채 주저앉아 있다면 우리는 단숨에 그의 상태를 눈치챌 것입니다. 그의 안에는 어떠한 기쁨도 희망도 없는
상태 즉 절망의 상태라는 것을 낙망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의 상태를 잘 드러내는
불안이라는 단어는 신음소리를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통 속에서 외마디가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것 같이 "흠" 하는 낮고 깊은 비명 같은 것입니다. 혼자 외로운 가운데 어디에다 하소연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홀로 이겨내야 하는 힘든 싸움에서 내는 소리입니다. 시인은 주저앉아 극단적 좌절 상태에 있으며 외마디 고통에 찬 작은 신음을
내고 있는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러한 상태에서 스스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록 절망 속에 있지만 그 상태를 숙명으로 받고 주저앉아 있지 않습니다. 그는
발버둥치고 있으며 회복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6절을 봅시다. [시 42: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My soul is downcast within me; therefore I
will remember you from the land of the Jordan, the heights of Hermon-from Mount
Mizar.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그 속에서 낙망이 되기 때문에 무엇을 합니까? 그는
주를 기억한다고 합니다.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시인은
그때 주님과 어떠한 일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주님과 만났던 일들 회상하는 것입니다. 영적
회복은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만났던 때를 회상하며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영적 침체에서 쉽게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7절에서 [시 42: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Deep calls to deep in the roar of your
waterfalls; all your waves and breakers have swept over me. 라고 합니다. 여전히 주의 파도와 물결이 자신을 엄몰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여전히
낙심이 여전이 불안이 그를 업습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하나님을 바라 봅니다. 8절입니다.
[시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By day
the Lord directs his love, at night his song is with me- a prayer to the God of
my life.그는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그의 인자하심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분을 찬송할 것을 소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의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기도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전히 그는 하나님의 인자함에 그리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9절은
그가 생명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시 42: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I say
to God my Rock, "Why have you forgotten me? Why must I go about mourning,
oppressed by the enemy?" 나를 잊으셨나이까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내가 내 원수의 압제로 슬프게
다닙니까? 이 기도는 불평의 기도일 수 있고 원망의 기도일 수 있으나 그의 심경의 토하여 낸 것이며
오직 하나님 만이 의지할 자이며 자신을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길을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잊지 말라고 살려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펴본 이 모든 것들은 영적 침체를 벗어나는데 있어서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 더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5절과 11절 입니다. 이 두 구절은 같은 내용 같지만 약간 다릅니다. 11절을 봅시다. [시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Why, my soul, are you downcast? Why s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my Savior
and my God. 시인이 자신의 내면에 가득한 낙망과 불안을 어떻게 극복하며 이겨내는가를 조사할 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영혼과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첫 단어가 내 영혼아 입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마치 자신이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가? 시인이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입니다. 이것들은 때때로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하며 우리의 의지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마음의 생각이라는 것은 저절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의 문제들이 떠오릅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또는 사건들이 마음을 흔듭니다. 싸웠던 생각들, 다투었던 생각들,
걱정했던 일들,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일들, 슬프고
화나게 했던 일들이 자신이 생각하지 않는데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낙망하고 불안한 것은 단지 그의 상황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마음의 생각이 계속해서 그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생각에게
명령하며 멈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명령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여기서 바라라는 말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말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는 자신에게 외치며 명령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너의 끊임없는 염려와 불안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생각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 것이 영적 침체서 벗어나는 중요한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왜 마음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늘 불안함 속에 거하는가 하면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멈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소리, 불안의 소리, 염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소리를 듣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 소리를 멈추어야 하며 명령해야 합니다. 내 영혼아 더 이상 나를 영적 침체에 가두지 말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고 선언해야 합니다.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찬양
하겠다는 그의 의지와 결단은 시인을 회복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동일한 영적 침체에 있는 우리를 회복하게 할 것입니다. 자신의 속에서 들려오는 낙망의 소리에 불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이 소리를 우리를 더욱 고통과 절망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눈물이 우리의 음식이 될 것이며 우리의 뼈들은 산산 조각이 나며 우리의 소망은 없어집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여 이러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극단적 좌절로 몸을 구부리게 하고 절망의 신음 소리만 낼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 갑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시고 말씀을
사모하시고 나오셔야 합니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십시오. 지속적으로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영적 침체에서 또는 신앙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