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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RxmVAXkfwIQ


누가복음 102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는 율법사의 질문에 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의 내용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중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이 말을 신앙적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예루살렘은 믿음의 도시이고 여리고는 세상 도시로 내려가다는 신앙이 내려가는 것을 의미해서 신앙이 내려가면 강도를 만납니다. 라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내려가다라는 말은 지형적으로 예루살렘은 높은 곳에 있고 여리고는 낮은 지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강도들은 이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을 지경을 만들어 놓고 버리고 갔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별명이 피의 도로입니다. 강도들이 숨을 만한 바위들이 많아서 강도를 만나기가 쉽기 때문에 불린 이름 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이제 곧 죽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벌거벗긴 채로 몸은 상하여 정신을 잃은 지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음절을 보면 그때 마침 한 제자장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마침은 우연히 라는 의미입니다. 제사장이 누구입니까? 아론의 후손으로 아무나 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직분이 아닙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기 위해 특별히 세워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거의 죽게 된 사람을 그냥 버려 두고 갈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나타난 제사장은 오히려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피하여 갔다고 합니다. 피하여 갔다는 말은 다른 길로 돌아서 갔다는 것입니다. 멀리서 사람이 벌거벗겨진 채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다른 길로 돌아 갔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예수님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강도 만난 자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또 다른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다음절인 32절을 보면 그 사람은 레위인이었습니다. 레위인은 레위 지파의 후손으로 성전 관리와 예배를 돕는 일들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레위인 만큼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 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멀리서 보고 피하여 다른 길로 갑니다. 왜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 주지 않고 피하여 돌아서 가버린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유 속에 등장시키는 것일까요?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까라는 질문을 하고 이 질문의 답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 두 개의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등된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등장한 제사장 레위인이 거의 죽게 된 자를 피하여 간 이유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추측 가능한 것은 피하였다는 말에서 돕기 싫거나 혹은 부정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할 책임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지 않습니다. 또는 혹시 하나님을 섬기는데 부정할까 하여 피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무엇이 우선인가 하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우선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라고 질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의미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 1420절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동일 한 것입니다. 누가 우선이고 나중이 아니며 어떤 것이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누가 보더라도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그들의 평생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등장 시키는 이유는 하나님께만 잘하면 된다는 치우친 신앙에 대한 경고입니다. 신앙이 한쪽으로 치우쳐 편협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면 된다는 생각에 다른 이웃을 돌보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며 돌보는 것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는 점을 모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 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 잘하는 것입니다. 헌금하고 말씀 훈련 받고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해야 할 내 책임과 의무를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신자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밖에서는 세상 사랑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장로이면 세상에서도 장로입니다. 교회에서 집사면 세상에서도 집사로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종교 생활을 하는 것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집에서의 삶이나 직장에서의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교회에서도 목사이고 교회 밖에서도 목사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 섬기는 것만 잘하고 밖에서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밖에서 사기치고 다니고 노름이나 하고 술집이나 들락 거려도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니까 괜찮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 속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 주는 한 인물을 등장시키시는데 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왜 다른 사람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키는가 하면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웃에 대한 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 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사마리아 사람은 사람도 아닙니다. 개 같은 이방이며 함께 말을 섞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웃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웃은 한정적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이 이웃의 핵심에 있고 그 둘레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입니다.

이렇게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웃이라는 개념은 제한적이며 좁은 개념입니다. 이런 이웃의 개념에 예수님께서는 파격적으로 유대인이 상종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 인을 포함시킨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가서 그 상처를 싸매며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합니다. 그리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밤새도록 돌봅니다. 그리고 여관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비용이 더 들면 후에 갚겠다고 하며 맡기고 떠납니다. 이 모습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충격적인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님과 율법사의 대화를 통하여 알게 됩니다. 36절을 보면 말씀에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질문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이 이웃이 되겠느냐 라는 말로 수동의 의미입니다. 강도 만난 자는 자신이 이웃을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은 선택된 것입니다. 즉 사마리아인이 적극적으로 이웃이 되어줌으로 말미암아 그는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웃은 필요를 원하는 사람에게 가서 되어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웃을 선택하고 정하고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웃을 그렇게 자신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를 원하는 자에게 가서 이웃이 되어 그들의 필요를 채우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인을 비유 속에 넣는 이유는 이런 이웃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 취향이 같고 성향이 같고 말이 통하는 같은 수준의 사람을 이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와는 맞지 않고 성향이 틀리고 수준이 다르면 경계하며 가까이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과 다 동일하게 친밀감을 가지고 가까이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주님은 우리의 이웃의 경계를 허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이웃이란 정해 놓은 어떤 부류가 아닌 어느 누구도 이웃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웃은 어떤 사람이 내게 이웃이 되기 위해 찾아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서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마리아 인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거의 죽게 된 사람에게 다가 갑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 무엇이냐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웃은 어디서 부터 시작되는가 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부유함이 아니며 학식이나 지위가 아닙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신자의 이웃은 늘 연약한 자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강자를 자신의 이웃으로 만들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그 앞에 한 없이 약해 집니다. 때론 아첨하며 비굴하게 굴며 그들과 같이 어울림으로 자신도 같은 부류가 되어 그들의 이웃 곧 친구가 되려고 노력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렇게 살지 않으며 강자를 이웃으로 만들려고 애쓰거나 노력하지 않습니다. 저는 교회 헌금에 대하여 누가 얼마나 헌금하는지 모릅니다. 이유는 비굴해 지지 않기 위해서 이며 사람에게 매이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교회에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을 목사들은 두려워합니다. 혹시 그 사람이 교회를 떠날까 봐서 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비유를 맞추기에 급급합니다. 저는 그러지 않기 위해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목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웃의 경계를 허문 다는 것은 교회 안에 나의 세력을 만들거나 경계를 만드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서는 내가 중심에 서면 안됩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여행중입니다. 할 일없이 관광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시각을 다투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그는 다음날에 주막을 떠납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그 사람은 약속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을 계속해서 간호 해야 함에도 그는 떠나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일이 바쁨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낯선 사람의 연약함을 자의적으로 돌보며 그의 이웃이 되어 줍니다. 자신의 희생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줍니다. 이 돈은 노동자의 이틀치 급여로 여관비는 한 데나리온의 30분의 1인 것을 감안할 때 강도 만난 자가 충분히 회복 될 때까지의 돈입니다. 자신의 물질까지 내어 놓을 뿐만 아니라 후에 더 드는 비용까지 책을 지겠다고 합니다. 이웃이란 이처럼 자발적으로 찾아가 아무런 대가를 구하지 않고 이익을 구하지 않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다 보면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웃은 나 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떤 부분은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기분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따르고 맞추어 주는 것이 이웃으로서의 여러분의 할 일들입니다.

마지막으로 37절을 보면 이 비유의 핵심은 행하라 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비유 속에서 행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두번이나 등장합니다. 율법사의 대답에서 그리고 비유 후에 율법사의 깨달음을 아시고 예수님은 그 깨달은 것을 행하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비유의 핵심은 행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깨닫고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행함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목사로써 안타까움은 말씀을 점점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점점 신자들이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되어 간다는데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이란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믿지 않기에 마음대로 삽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란 삶에 있어서 무신론자들처럼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산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고 하는데 삶은 무신론자인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라는 것은 행함과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지 산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믿음은 믿음 아닙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는데 죽었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그것은 믿음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함은 내가 가진 믿음이 참인지 아닌지를 구별해 주는 시금석이며 믿음은 행함을 유발시키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과 행함 사이의 인과 관계입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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