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이름이 흙에 기록되는 인생 예레미야 17장 13절

by YC posted May 0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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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xj47ttsh4o0


하나님을 어느 특정한 장소나 또는 어느 특정한 지역이나 일에 제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며,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편재하시며 무소불위 하신 하나님이 이시라는 점입니다. 편재 라는 말은 어디에서나 계시며, 어느 곳에서 동시에 존재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1397-10절을 보면 시인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까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늘에 올라갈 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고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재란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어디에서 임재하여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동시에 어디에서 존재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몸을 입고 있고 때문에 반드시 한 장소에만 제한 되어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비되는 존재가 아무리 강력한 존재이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리를 대적하는 존재인 마귀 조차도 편재하지 못합니다. 그는 반드시 한 곳에만 존재할 수 있으며,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천사 또한 편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편재하시는 능력이 있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편재라고 할 때에 하나님이 모든 장소에 계시며, 존재하신 다는 것이 하나님이 그 모든 장소에 제한 되어 그 안에 계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주를 지으신 분으로 우주보다 크시기 때문에 그분은 어느 공간에도 담길 수 없이 크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우주는 오히려 그분 안에 담겨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래전부터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되고 왜곡된 지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날조하며, 무시하며, 비웃어 왔습니다. 열왕기상 2028절을 보면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람의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겨서 패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심으로 그들이 여호와는 산의 신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잘못을 드러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산에 제한 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산에 제한 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예레미야서는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신이 없으며, 세상의 어떤 나라도 하나님이 세우실 때에 일어나며,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힘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남 유다는 주변의 강대국들에 의해서 억압을 당하며 언제 전쟁이 일어나서 나라가 망하게 될는지 알지 못하는 불확성이 극에 치달은 상황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불안한 민심과 요동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치고 있는데 예레미야 1713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부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호칭합니다. 여기에 소망이라는 말은 의지하다 기대하다라는 뜻의 단어가 아니라 간절히 기다리다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려야 하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밖에 기다릴 자가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자 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살고 있는 시대에 북쪽으로는 앗수르와 또한 신흥 국인 바벨론이 힘을 대결을 하며,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또한 남쪽으로는 애굽이 또한 이들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남 유다는 국력이 쇠락하고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태에서 이들의 눈치를 보면 어느 쪽에 붙어야 자신들에게 유리하며, 생명을 보존할지를 점치며, 어제는 앗수르를 그리고 오늘은 애굽을 응원하고 의지하고 어떤 이들은 바벨론을 의지하려고 하고 있는 국론이 분열되고 국가는 혼란으로 자중지란에 빠진 상태인 것입니다.

        그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 만을 소망하라 즉 간절히 기다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지배하며 다스리는 분이시기 때문에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들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버린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며, 하나님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으며 간절히 기다리며,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이들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에서 잊어버리고 떠나 버리고 버려 버린 그들의 마음은 아무것도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예레미야 175-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며 하나님을 버린 자들이 찾아가며, 의지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믿으며 라고 할 때 이 단어는 의존하다, 의지하다 라는 뜻으로 이 단어의 의미 속에는 무엇으로 안도감과 행복을 얻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대신에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에게 의존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이 의존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안도와 행복을 기대하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그리고 자신의 평안과 기쁨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주변 열강들을 의존하며 그 나라들이 자신을 안전하게 하며, 행복과 기쁨을 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심에는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눈에 보이는 즉 자신이 피부로 직접 와 닺는 현실적인 방편들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사람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하여 입니다.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일들을 무시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눈에 보이는 강대국들의 힘이 그들의 마음을 이끌었습니다. 그렇기에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게 된 것입니다.

육신으로 힘으로 삼는 다는 말은 누군가 어떤 사람이 자신의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다는 것이며,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힘이란 단어는 팔뚝 또는 어깨라는 뜻입니다. 한국 말에 니 팔뚝 굵다 라는 말이 있는데 팔뚝이 굵다는 말은 힘이 세다 라는 뜻입니다. 니 팔뚝 굵다 라는 말은 조롱으로 그래 너 잘났다 라는 뜻입니다. 비아냥입니다. 영어로는 okay you are the boss 라고 번역이 됩니다. 예레미야 당시의 사람들에게 팔뚝이 굵은 자들을 의지하며 나의 힘이 되고 나의 버티목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팔뚝이 굵은 자들을 즉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며, 자신은 그들로 인하여 행복하며 즐겁게 될 것이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직접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저주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주는 하나님께서는 내리시는 재앙이지 사람이 내리는 재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주라는 말은 불행이며, 재앙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저주 자체가 그러한 것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모든 은혜를 저주 받은 자에게 끊어 버리심으로 그는 하나님께 버려져 비참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결코 그에게 오지 않을 것이며, 사막의 떨기나무 같이 열매는커녕 말라 비틀어진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을 소망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저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찾는 자들을 망하지 않게 하십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망할 것이라고 저주할지라도 하나님이 저주 하시지 않는 한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한 그를 의지하는 자들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을 자신의 팔뚝으로 삼는 자들은 반드시 그 팔뚝으로 인하여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다시 예레미야 1713절을 보면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며,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될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이름이 기록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로 생명책에 구원받은 자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으로 이것은 기록된 자에게는 무한한 영광이며, 자랑이며, 기쁨입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부하고 행복하고 즐겁게 살다는 네가 죽는 날에 너는 영원히 지옥에 가서 살 것이다 라는 것을 누구고 기쁨으로 받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언제 죽을지 몰라 두렵기 때문이며, 이 땅에 잠깐의 즐거움과 영원한 지옥의 고통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아는 자에게 간절한 바람은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들 또한 기록이 되는데 어디에 기록되는가 하면 흙에 기록이 된다는 것입니다. 흙에 기록이 된다는 것은 지워지며,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결코 기억하시는 자들이 아니며, 하나님께 잊어버리며, 버리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흙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는 결코 하늘에 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은 후에 비석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어 오랜 동안 자신들의 이름이 기억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죽은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며, 어떤 즐거움이 있겠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영혼이 지옥의 고통 속에 있는데 자신의 이름이 비석에 새겨져 있는 것이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며,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것이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당하는 고통 속에서 절규와 비명만이 그에게 허락된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흙에 이름이 기록되면 안됩니다.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영안이 열려야 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나에게 큰 힘이 되리라 사람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신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을 붙들고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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