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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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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상https://youtu.be/Wr8iahM7uvc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신경 가운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라는 구절에 대한 이해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또한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예수님께는 특별히 외아들 즉 독생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15절을 보면 이 구절은 우리와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데 우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예수님의 다름은 본질적으로 우리는 양자로써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입양된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시고 본질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십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하시고, 본질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라는 것에 대하여 요한복음 114절을 보면 예수님과 우리의 자녀 됨의 본질적 차이는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입니다. 즉 피조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로써 하나님에 의해서 나신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 6-8절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은 그분은 원래 하나님이셨다는 말입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이셔서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셨습니다. 여기서 동등이라는 말은 양이나 질에서 차이가 없는 같다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서 2:1절을 보면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을 향하여 형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지 우리가 예수님을 형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분수를 넘어서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가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한다면 예수님을 마치 우리가 친하게 여겨 가볍게 생각하는 태도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것에 감사할 뿐이지 이러한 엄청난 호의에 대하여 덥석 형이라고 부르며 경외감을 거두고 가볍게 대하고자 하는 태도는 불경스러운 것입니다.

        야고보의 경우를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가 되어 베드로와 함께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됩니다. 그가 쓴 야고보서 가운데 야고보서 11절을 보면 그는 스스로를 소개하기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2:1절을 보면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대답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왜 예수님만 독생자라고 하시고 우리는 입양된 자녀라고 하시는가? 이것은 차별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품게 되는 이들이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단어가 바로 입양된 즉 양자 됨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생각할 때에 먼저는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셨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관계 조차도 파괴되고 이제 원수가 된 관계로 전환되어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 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극단적 변화는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우리가 생각 할 수도 이룰 수도 없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둘째로 그리스도와 우리의 다름이 친 아들이냐 입양된 아들이냐에 대한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적 다름에 대하여 입니다. 답변에서 본질로 라는 말이 그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 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왜 예수님만이 독생자라고 불리우시는가 하면 그분은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본질상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십니다. 본질상이란 말은 그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비교 불가이며, 상대 불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독생자가 되어 참 아들이 되지 못하는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며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 신경에서 우리 주 라는 표현에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라는 표현은 바울의 서신서에서 많이 발견되는 표현인데 왜 예수님을 우리 주라고 표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 부분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보면 왜냐하면 그분이 금이나 은이 아니라 그의 보혈로써 우리 몸과 영혼을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구속하셨고, 우리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여 주의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답변에는 두 가지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첫째는 돈을 주고 우리를 사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몸과 영혼을 함께 사셔서 모든 죄로부터 건져 내신 것입니다. 자신을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의 생명을 사신 것이며, 대속하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은 우리 몸과 영혼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모든 죄에서 구속되게 된 것입니다. 죄에서 구속하셨다는 것은 더 이상 죄의 지배아래 살지 않게 하심이며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죄를 짓지 않는 다는 말이 아니라 구속함을 받은 이들은 절대로 죄에 종으로 돌아가거나 노예로써 다시금 죄의 완전히 지배가운데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여 주의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 주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신 것입니다.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이라는 말이 가지는 것은 복음을 받아 들이고 믿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가 시험하지 않으며, 마귀의 유혹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6:18절을 보면 [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 것이 모든 마귀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2 14-15절을 보면 [ 2:14-15]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주님께서는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심으로 인해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해방하여 주시고 우리를 주의 것 삼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새로운 주인이 생겼으며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아끼지 않으신 분이시기에 우리를 얼마나 위하시며, 사랑하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복된 자이며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자유의 속박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분 안에 있어야 우리의 삶이 안전하며, 모든 인생의 도우심을 받을 뿐만 아니라 보호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복인 것입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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