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서 없어질 때

by YC posted Jan 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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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IfHuQliahio

2024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이 한해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이 점점 더 어떻게 변할 것인지,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지에 대하여 예언적인 말씀으로 주신 것들이 있습니다. 디모데 후서 3장을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떠한 세상이 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는데 디모데후서 31절을 보면 바울은 디모데 목사에게 너는 이것을 계속해서 알고 있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있을 것이라는 말은 미래형으로 오게 될 것이다, 다온다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다면 말세는 언제인가 하는 것인데 구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도래 즉 우리 주님의 오심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되었지만 신약에서는 주님의 부활 승천 이후 재림의 때까지를 말세라고 말합니다. 즉 지금 우리는 말세를 살고 있는 것이며, 고통하는 때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단어는 견디기 힘든, 거칠고, 난폭한 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을 들을 때에 사람들은 쉽게 공감 할 수도 있습니다. 전세계를 불안하게 하는 큰 전쟁이 두 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과 기후 변화의 심각성은 점점 더 심해지고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쉽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시대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말세의 고통과 그 고통을 당하는 자들은 현재 인류가 처한 각종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으로 도래하는 것으로부터의 고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바울이 말하고 있는 고통의 대상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대로, 세상이 가는 길이 아니라 다른 길과 다른 삶을 선택한 자들 곧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이 겪게 될 고통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디모데후서 312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건한 삶은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표현 속에서 도덕적, 윤리적으로 바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입니다. 둘째로 이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말씀에 부합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을 삶의 원리로 삼고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들이 박해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 박해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불경한 시대 속에서 경건한 삶을 추구함으로 받게 되는 고통입니다.

        이에 대하여 디모데후서 32-3절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기애에 취하여 지나치게 자기 유익에만 집중하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만족, 자기 기쁨이 삶의 우선순위로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서 살아가는 자들인 것입니다. 또한 돈을 사랑하고 교만하고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않으며 거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고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4-5절을 보면 배신하며 조금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그러나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2-4절까지 나열한 내용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부분에서는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일 수 있으나 자기나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이지 않으며, 교만한 것도 절제하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 속에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은 불경건에 속하는 일들이라는 사실 속에서 말세에 고통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 때문에 즉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불의한 일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이들이 사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하며, 그 삶에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 보시기에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 고통이며, 힘듦 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이 겪는 문제는 지금 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우리 보다 앞선 믿음의 선배들 또한 고민하며, 겪었던 문제들입니다. 시편 128절을 보면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을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뛴다고 합니다. 비열함이란 하는 짓이나 성품이 천하고 못나는 것으로 성품이 곱지 않거나 또는 하는 짓이 더럽고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를 말하며 이러한 성품이 사람들 중에서 높임을 받을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즉 사방에서 보이며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시편 12편은 다윗의 시로 그는 자신 주변에 비열한 인격과 성품을 가진 자들이 사방에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불경건하고,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들이 우리 주변에 넘쳐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 살 때에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자들이 받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21절에서 이렇게 구합니다. 시편 121절을 보면 영어 성경에서는 주님으로 번역이 되었지만 원문은 여호와입니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도우소서 라는 말은 건져내다, 구원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에 대하여 도와달라고 하는가 하면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서 없어지고 있기 때문에 도와 달라고 합니다.

        경건한 자들이 끊어진다는 말은 중단되다, 끝나다 라는 의미로 경건한 자들이 더 이상 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문제들이 일어나게 되는가 하면 바로 비열함이 인생 중에서 높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경건한 자들이 득세하며,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이 높임을 받으며, 사람들이 그들을 높이며, 그러한 삶이 옳은 삶이고 가치 있는 삶이고, 인생의 기준이며, 삶의 모본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세의 고통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으며,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분이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라고 조롱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욥기 2114-15절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깁니까? 즉 예배합니까? 또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들 조차도 이러한 물음을 물으며,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건한 자들이 끊어지고 충실한 자들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득세하며, 넘쳐나는 때에 다윗은 어떻게 경건과 충실함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생을 살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편 122-3절을 보면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하는데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합니다. 두 마음으로 말한다는 것은 한쪽 마음과 한쪽 마음이라는 말로 한쪽 말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른 한쪽 마음은 다른 생각을 품는 것입니다. 왜 경건한 자들과 충실한 자들이 없어지는가 하면 이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말하지만 다른 한쪽의 마음은 다른 것들을 품고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윗 시대에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자들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속에 참으로 하나님 앞에 신실하며, 충실한 자들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다윗이 알고 있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혀를 끊어버리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말은 이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망하게 될 것이며, 더 이상 그들의 행위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영원히 이러한 삶을 유지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언젠가 그들의 끝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확신한 것입니다. 시편 125-6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하면 내가 지금 일어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일어나서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으로 탄식하는 자들을 위하여 안전한 곳으로 그들을 이끌기 위하여 일어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하기 때문에 즉 약속을 지키시며,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흙 도가니를 일곱 번 단련한 은 즉 무결점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다윗이 주변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란 경건한 자 즉 하나님 앞에 신실한 자들이 사라지고 충실한 자 즉 충성된 자들이 사라지는 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그 약속이 성취될 것임을 확신하며, 그 약속을 의지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는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충성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다시 시편 121절을 보면 다윗이 여호와여 도우소서 라고 청원하는 기도를 드림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비열함이 사람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는 시대를 살고 있으며, 주변에 하나님께 경건하며, 충실한 자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상황에 처할 때에 그가 붙잡는 것은 또한 우리가 붙잡아야 할 분은 바로 모든 연약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여호와라 이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 여호와라 이름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까? 여호와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지만 이분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며, 자신의 말씀을 이루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성품은 경건하고 충실한 자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3123절을 보면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진실한 자들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는 분이시 때문입니다. 여기서 진실한 자라라고 할 때에 이 말은 아만이라는 말로 아멘이라는 말의 뿌리입니다. 이 말의 또 다른 말은 충성된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121절에서 충실한 이라고 할 때에 이 단어도 아만입니다. 즉 충성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자들을 보호하십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79절을 보면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실한 이라는 단어는 아만입니다. 즉 믿을 수 있는 확실한 분이라는 의미이며, 또 다른 의미로는 충성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충성된 분이신가 하면 바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충성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신의 백성된 자녀들인 우리에게 충성을 다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할 때에 높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충성을 하는가 우리가 높으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실하신 즉 충성을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보여지는가 하면 약속을 지킴으로 입니다. 또한 NIV에서는 사랑의 언약으로 번역이 되었지만 다른 영역본들에서는 두개입니다. 하나는 언약을 지킴으로 둘째는 인애를 지속적으로 행하심으로 입니다. 인애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이 헤세드 라는 말은 강자가 약한 자에게 자발적인 헌신이며, 섬김이며, 충성입니다. 자격이 없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며, 충성을 다하는 것이 바로 인애이며, 하나님은 바로 인애를 통하여 충성을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