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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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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영상 https://youtu.be/i54RG_xRiy8


오늘날 현대 교회들이 전하는 복음의 특징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거부감이 일어나게 하거나, 또는 마음을 불편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치워버려 아무런 제약이나, 거부감 없이 교회 안에서 편안함과 기분 좋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매료시키며, 즐겁게 하며,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착하여 죄인들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회개나 죄 용서와 같은 말을 꺼낼 수가 없으며, 자기 부인이나,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일 같은 것은 불필요한으로 여겨 사람들의 귀와 눈에서 멀리 치워버린 것입니다.

        또한 죄에 대하여 거론한다고 해도 심리학적으로 죄를 분석하여 과거의 정서적 불완전으로 인한 실수나 혹은 성격적 결함정도로 여기도록 하며, 환경의 문제로 돌려버렸습니다. 그리고 사회 규범으로써의 도덕이나 윤리적 개념 속에서 죄를 인식하도록 하여, 죄를 사회의 틀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문제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에 대한 이해와 죄를 접근하는 방식과 태도는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를 살펴볼 때에 신약 성경은 죄라는 의미를 나타낼 때에 다섯 개의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다섯개의 단어들을 한데 나열해서 놓고 보면 두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죄의 수동적 측면이며 또 다른 하나는 죄의 능동적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가 있는데 하마르티아 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죄를 표적에서 빗나간 것,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아디키아 라는 단어로 불의 혹은 부정이라고 번역이 됩니다. 셋째는 포네리아 라는 단어로 사악하거나 부패한 종류의 악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넷째는 능동적인 단어로 파라바시스 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침입하다 혹은 침해하다로 일정한 한계를 너어가는 것을 표현합니다. 다섯째는 아노미아 라는 단어로 그 뜻은 무법 즉 일정한 법을 무시하거나 어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다섯개의 단어들을 생각해 볼 때에 이것들은 어떤 객관적인 표준이 이미 정해져 있으며 그러한 기준에 이르지 못하거나 또는 선을 고의적으로 넘어가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이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성경은 이 기준은 하나님의 의해서 제정되었으며 죄란 그 하나님의 정하신 기준이나 표준에 이르지 못하거나 또는 넘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죄가 결코 그저 유감스럽게 탈선된 정도가 아니라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으로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인 반항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8:7절을 타락한 인간 내면에서 끊임없이 발생되는 모든 생각,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원수삼고, 대적으로 삼는 일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죄에 대한 표현들을 보면 죄는 하나님의 전능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올려 놓기 위하여 주 하나님을 쫓아 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 3 22절에서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는 표현은 선악을 결정하며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님 밖에 없었는데 인간이 이제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결정하는 위치에 올라 마치 자신이 하나님처럼 선과 악의 기준을 자신의 마음대로 정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처럼 여겨 자신의 판단을 가치 기준으로 삼고, 악을 선이라, 선을 악이라 말하며 하나님을 배재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성경은 죄에 대하여 결코 문화적 금기나 사회적인 큰 실수 정도로 대강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심각하게 취급되어져야 할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심각성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명확하고,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인간들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진노를 쏟아 부으셔야만 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하셔야만 하는가? 하나님의 죄를 대하시는 방식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너무나 지나친 반응이며,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간들에게 심히 괴롭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인간이 지은 죄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 죄를 용서 받기 위한 대가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죄를 이렇게 밖에 취급하지 못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른다면 여전히 어리석은 생각이나,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거룩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하나님과 죄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바국 113절을 보면 하나님은 정결하셔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시킬 수 밖에 없으며, 그분의 얼굴을 우리에게 감춰지게 하시며, 이사야 59:2절을 보면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습니다. 또한 죄는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가리우게 하며 우리가 무슨 말을 하건 전혀 듣지 않으시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하여 말할 때에 그분이 죄악을 배척하시는 것이 마치 인간의 몸이 독을 토해 내는 것과 같이 격정적으로 표현한 것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구토는 이마 인간의 모든 반응 중에서 가장 격렬한 반응일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가나안 족속의 비도덕적이고도 우상 숭배적인 삶들이 너무나 역겨웠기 때문에 토하여 낸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레위기 1825-28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주민을 토하여 내듯이 너희도 그 땅을 더럽히면 토하여 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땅이 주민을 토하여 낸다는 것은 땅 자체가 어떠한 능동적 힘을 가지고 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땅에서 토하여 내는 것을 상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사하신 것으로 그 땅을 하사 하신다는 것은 그 땅이 바로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이 주인이시라는 것으로, 그분이 거기에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소유물 가운데서, 그리고 자신이 계신 그곳이 더럽혀지는 것을 참아낼 수가 없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시편 9510절을 보면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사십 년 동안의 행적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인데 그 세대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근심하였다고 합니다.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지낸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하나님이 근심하였다고 하는 것은 걱정하였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의 의미는 역겨워하다 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악들로 인하여 역겨워하셨다는 것입니다. 토해내고 싶을 정도로 더러움을 느끼고, 매스꺼우며, 도무지 참아 낼 수 없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죄에 대한 가벼운 생각은 용서에 대한 가벼움으로 이어져, 죄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죄로부터 분리되도록 구원하신 우리 주님의 구원의 목적을 헤치며, 진정으로 구원받지 못했지만 스스로 구원 받은 자로 여기며, 용서 받은 자로 믿는 거짓된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는데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자행되어지는 성도들의 형편 없는 신앙 모습 속에서 분명하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왜 하나님께서 그토록 미워하시는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얼마나 미워하시고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하나님만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들 속에서 조금이나마 죄에 대한 인식과 죄악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인지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 죄와 죄악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역사하며 일어나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며, 넘어뜨리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지를 깊이 인식하고 깨달아 믿음과 온전한 신앙에 바로 서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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