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하나님은 왜 독생자를 주셨는가 요한복음 3장 16절

by YC posted Aug 3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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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vSQcybVY2cY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 복음 316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의 성경 구절 가운데서 복음을 가장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으며, 전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와 대화 중에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첫번째 부분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 말씀의 첫번째 문장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강조 되는 부분은 이처럼 이라는 단어입니다. 원어에서 이 구절에서 첫번째로 나오는 단어가 이처럼 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나오는 내용이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라는 단어는 이와 같이 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같은 방법으로 라는 의미도 됩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방법으로 무엇이 발생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무엇을 하였는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셨다는 의미인데 그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에서 말하고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것은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처럼 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지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것과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할 때에 이 말이 의미하는 것과 목적하는 바가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을 지지하거나, 당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옳다고 하거나, 그것을 이루도록 돕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나 뜻하는 것을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힘껏 도와 이루게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방식이 이처럼 이라는 말에 한정되고 그 목적과 의미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즉 이와 같이 사랑하셨다 라고 하는 방식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떠한 방식과 방법으로 사랑하셨는가 하면 독생자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독생자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유일한 아들이라는 의미인 동시에 하나님께서로부터 나신 유일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에 요한 복음에서 말하고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우리와 예수님은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에 대하여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고, 잘 알지 못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은 독생자로서 아들이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유일한 동일 본질과 동일 능력과 동일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전혀 다른 하나님의 아들인데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부 하나님께 입양된 자녀들 곧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그리스도는 동일하게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너희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따로 구분하고 분리해서 사용하십니다. 마태복음 545절을 보면 우리 주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이유는 그분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의미와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요한복음 3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랑하셨는데 그 방식은 자신의 하나뿐이며, 하나님인 자신의 아들을 주시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의 방식을 자신의 아들을 주시는 방식으로 하셨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단순히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삶을 더욱 나아지게 하고, 편리하게 하고, 편안하게 하며, 어려움 없고, 고통 없는 행복한 삶만을 원하셨다면 자신의 아들을 주시는 일이 과연 필요했을까? 하는 물음 때문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그 방식이 자신의 아들을 주시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이 인간이 그들의 현실적 필요와 현실적 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자신의 아들을 주시는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무엇인가 다른 일이 있으며, 다른 더 중요 문제 즉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주시는 방식이 아니면 안되는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이 구절의 핵심이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라는 말은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얻으려고, 혹은 무슨 결과에 도달하려고 하는 뜻입니다. 이는 이라는 말은 문장 속에서 앞에 나오는 모든 말의 목적이자 이유입니다. 즉 이러한 것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일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일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앞의 일 즉 자신의 아들을 주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시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주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시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무엇을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우리는 두 개의 반대되는 개념이 대조되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는 멸망이고 다른 하나는 영생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주시는 목적과 이유가 멸망하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영생함을 얻을 수도 없는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세상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인류를 뜻합니다. 즉 모든 인류는 멸망을 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멸망이라는 단어의 뜻은 파괴하다, 죽다, 사라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죽어 파괴되어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인데 이는 단지 죽으면 없어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조로 말씀하고 있는 영생 이라는 것이 단지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영생함을 얻는 다고 할 때에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라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산다는 것이 무의미한 삶이라면, 허무한 삶이라면, 또한 병들거나 불행한 가운데 영원히 살기만 한다면 그것은 전혀 누리고 싶지 않은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생이란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영원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영생을 얻을 때에 이는 영생하는 능력을 인간 스스로 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직 홀로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합하므로 그분의 영원한 생명이 인간 속에 흘러 넘침으로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디모데전서 616절을 보면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이 바로 로마서에서 말한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영생이라고 할 때 우리가 영생 자체를 소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지 아니함이 있으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왜 중요한가 그것이 정말 행복하게 하는 일이며, 행복한 삶이 될 것인가 하는 물음에서 하나님은 복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생은 조금의 지루함이나, 조금의 공허함이 없는 완전한 상태의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삶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111절을 보면 하나님을 복되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복되신 이라는 말은 복의 근원이자 복으로 충만하신 이라는 뜻입니다. 이 복은 다른 말로 인간들이 추구하는 염려 없고, 걱정이 없는, 평안함과 만족으로 채워지는 행복입니다. 이에 대하여 신명기 3329절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는 행복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같이 얻은 백성이 행복한 자라면 자신의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심을 받아 영생을 얻는 자 또한 행복한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들과 우리를 바꾸신 것입니다. 영생이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멸망은 결코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멸망의 또 다른 의미는 잃어버리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즉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림을 당하여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가게 되는 곳을 지옥이라 부르며, 세상의 마지막 날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에 던져져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진노의 심판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요한복음 316절을 보면 이러한 내용들을 통하여 우리가 요한 복음 316절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 복음 316절은 단순히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주시는 방식으로 사랑하신 것은 모든 인류는 멸망을 받을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가 처한 상태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으며, 누구도 이 멸망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멸망에서 건져냄을 당하는 일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오며, 인간에게 구원이 절대적이며, 구원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316절은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것 이전에 멸망이 당신 눈 앞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무제는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겪는 작은 문제들이 아니라 내 육체와 영혼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 앞에 놓여 있으며, 그것을 지금 당장 해결하지 않는 한 내게는 어떠한 평안이나, 안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복음 316절은 복음의 긴박성과, 긴급성을 듣는 모든 이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 육체와 영혼이 지금 멸망을 받을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거나 어떠한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멸망의 이유가 우리의 죄 때문인데 이 죄는 사람에게 지은 죄가 아니라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께 지은 죄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우리의 능력 밖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주셨다는 의미 속에는 우리 주님에 대한 많은 내용들이 함축 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자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죄에 대한 대가는 죽음이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대신 지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214-15절을 보면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들은 인간들로 이들은 육체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또한 같은 모양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대가는 사망 곧 심판의 죽음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더 이상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게 하며,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었으며, 어떻게 우리가 지은 죄를 해결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25-26절을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합니다. 피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물과 피를 쏟으심으로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그분은 화목제물로 자신의 생명을 드리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화목제물은 진노를 누그러뜨리다는 뜻입니다. 누구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가 하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고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더 이상 죄인으로 서지 않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바로 자신의 아들의 죽음으로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그분이 직접 담당하시고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돕고, 이루게 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당하게 될 무섭고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멸망을 당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에 대하여 로마서 5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즉 우리 편에서 우리 자신의 죄의 문제를 어느 쪽으로든 어느 방식으로든 해결할 수 없이 멸망이 운명지어졌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확증이란 입증하다, 증명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사랑하십니까? 자신의 아들을 주시기 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이 필요합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한 죄인들이며, 하나님을 믿지도 알지도 아니하며,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심을 부인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진노를 통한 멸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을 하신 것이며,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 복음 316절에 말하고 있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진노와 멸망에서 건짐을 받아 구원 받은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