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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2017.05.11 13:26

뉘우침 < 마태복음 21:28-32절 >

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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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상 https://youtu.be/j3iphAdmMuU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과의 대화 속에서 예수님에 의해 결말로써 주어진 비유의 입니다. 28절을 보면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한 아버지는 두 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먼저 첫째 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이에 29절을 보면 아버지의 명을 받은 첫째 아들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대부분의 영어 성경과 본문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데 영어 성경은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대답이 한글 성경과 서로 다릅니다. 29절에 첫째 아들은 가겠다고 했지만 가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은 첫째 아들이 가지 않겠다고 했다가 후에야 가겠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 가겠다고 했다가 안가고 안 가겠다고 했다가 갔는가 하는 것은 사본 상의 문제(한글 성경은 바티칸 사본을 근거로 영어 성경은 시내 사본을 근거로 번역함)로 내용에는 크게 다름이 없습니다.

         첫째 아들은 가겠다고 아버지에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는 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에서 첫째 아들은 건성으로 아버지에게 대답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내가 가겠습니다. 라는 자신의 의지와 자발적 행동을 강조하는 에고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지 않았습니다. 30절은 둘째 아들의 반응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첫째 아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싫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원하지 않는 다는 뜻으로 나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 나는 원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포도원에 가지도 않을 것이고 일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거절했던 둘째 아들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후에 라는 말입니다. 그 후에라는 말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상태를 말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즉각 반대를 하였고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는데 뉘우침이라는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둘째 아들은 시간이 지난 후에 감정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 변화에는 분명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그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가 뉘우치고 갔다라는 표현은 포도원으로 갔다는 것이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31절에서 예수님께서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듯대로 하였느냐고 물었을 때 모두다 둘째 아들이라고 말한 이유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 대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뉘우침이란 단어는 메타멜로마이 입니다. 헬라어에 뉘우치다 라는 단어는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에서 예수님이 사용한 메타멜로마이 라는 단어이고 다른 단어는 메타노이아 라는 단어 입니다. 이 두 단어는 동일하게 후회하다, 뉘우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내용이 각기 구별됩니다.

         메타멜로마이라는 단어는 뉘우침에 있어서 범위가 감정에 제한되는 것으로 양심의 가책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감정적으로 뉘우치며 후회하는 것입니다. 즉 마음의 후회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 3절을 보면 이 단어가 사용된 구절이 나옵니다. 가롯 유다는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다고 합니다. 여기서 뉘우치다 라는 단어가 메타멜로마이라는 단어로 마음의 후회이며 감정적 후회와 뉘우침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같은 뉘우치다 라는 단어인 메타노이아 라는 단어는 그 범위가 감정이 아닌 근본적인 행동의 변화까지도 만들어내는 후회요 뉘우침입니다. 그래서 한글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회개하다 라는 단어로 번역합니다. 그렇다면 둘째 아들은 마음에만 뉘우친 상태이며 마음에만 후회한 것입니까? 왜냐하면 메타멜로마이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맥 속에서 둘째가 마음의 후회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는 그냥 마음으로 슬퍼하며 뉘우치며 그냥 그 자리에 있던 자가 아니라 그는 바로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일을 하였습니다. 즉 둘째 아들은 마음의 후회가 있은 후에 그는 의지적인 변화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의지적 변화와 행동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단어인 메타노이아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는가? 하는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32절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꺼내시는 이유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완악함과 불순종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입니다. 세례 요한이 의의 도를 전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세리와 창녀들 즉 종교적으로 타락하며 불결하며 죄인으로 치부되었던 그들은 요한의 의의 도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종교적이며 더욱 신앙적이며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라고 스스로 높이며 자랑하였지만 그들은 이것을 보고도 끝내 그를 믿기 위한 회개의 감정조차도 같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이들은 행동과 의지의 뉘우침과 후회이며 회개인 메타노이아는 고사하고 마음의 후회이며 뉘우침인 메타멜로마이 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온전한 회개는 커녕 마음의 후회와 뉘우침 조차도 없는 것이 문제이며 이러한 상태가 얼마나 큰 문제이며 심각한 것인지를 깨달으라는 책망이요 꾸짖음입니다. 그래서 메타노이아 대신에 메타멜로마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마음의 후회인 뉘우침은 온전한 회개의 전 단계입니다. 일반적으로 온전한 회개인 메타노이아는 마음의 후회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의지와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주의 해야 할 것은 마음의 후회만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는 잘못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유다도 뉘우쳤다는 사실입니다. 뉘우쳤지만 그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마음의 후회가 아니라 의지와 행동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후회와 뉘우침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자신에 대한 생각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 앞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내가 만약 이렇게 산다면 이것이 옳은 것일까?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이며 괜찮은 것일까? 하는 의문과 진지한 고민이 시작됩니다. 그 가운데 후회와 뉘우침과 무엇인가 바르게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고린도후서 7 10절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다고 합니다. 근심이라는 단어는 슬픔으로 마음의 고통이며 한숨이며 아픔입니다. 본문에서는 두 개의 근심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는 세상 근심이요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세상 근심은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멸망에 도달하는 근심이 있지만 반대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도 있습니다. 이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이라는 뜻은 하나님에 따라 또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가운데 가지게 되는 근심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근심을 주십니까? 라는 질문에 이 근심이 생산해 내고자 하는 것은 회개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의 근심이 회개를 만들어냅니까? 11절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근심이 사람들 안에 만들어내며 생산해 내는 것은 변증하게 함입니다. 하나님은 슬픈 마음을 사람들 속에 넣어 두심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슬픔과 눈물과 한숨으로 인해 더욱 변증합니다. 변증하다는 말은 자신들이 범했던 죄를 진지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하여 슬퍼하며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가슴 아프게 하십니다. 이것이 회개의 첫 단계인 마음의 후회함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생각하고 자신을 생각하며 자신의 잘못과 과오를 인정하고 후회하였듯이 회개에 이르는 후회는 자신의 죄를 진지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동을 일으킵니다.

         또한 얼마나 분하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근심은 우리에게 분노를 일으킵니다. 이 분노는 사람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한 분노이며 분개이며 화남입니다. 어떻게 내가 이러한 죄를 지을 수 있는가? 어떻게 내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이렇게 밖에 순종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이며 화입니다. 또한 두렵게 합니다. 이 두려움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이며 죄인을 향한 진노의 팔을 드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죄를 대적하시며 죄를 멸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앞에 죄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느끼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회개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회개는 단순히 마음의 뉘우침이 아닙니다. 감정의 변화나 감정적 후회가 아닌 의지와 행동의 변화이며 하나님과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구원을 얻게 하실 자들에게 근심을 주십니다. 여러분 마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슬픔이 있어야 하며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이르는 회개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세상 근심으로 가득하여 그것으로 마음이 슬퍼하지 마시고 세상 근심이 아니 하나님이 주시는 근심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의 뉘우침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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