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누가 행복한 자인가 <시편 32편 1절과 로마서 4장 1절부터 8절>

by 박경호목사 posted Sep 0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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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상   https://youtu.be/s-RUxKqVcVc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시편 32 1절을 보면 마스길이란 교훈이라는 뜻으로 즉 다윗의 교훈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이 말하고자 하는 자는 복된 자에 대하여 입니다. 왜냐하면 원어의 다윗의 마스길이란 말 이후에 등장하는 첫 단어가 복이 있도다 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기록되었기 때문이며 이 단어는 감탄사입니다. 이 말을 현대어로 옮기면 얼마나 행복한가! 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자연스럽게 읽는 이로 하여금 누가 왜 이렇게 행복한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라는 비명에 가까운 행복함을 표현하는 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왜 행복해하는 것입니까? 사함을 받고 가려진 자는 행복하다고 하는데 사함이란 용서를 말하며 가려진 이란 덮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용서 받았고 무엇이 덮여져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까? 허물이 그렇고 죄가 그렇다고 합니다. 여기서 허물이란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또한 죄란 실제적 위법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허물과 죄가 용서받고 가리워진 것입니다.

         이 구절이 신약에 인용이 되었는데 로마서 4 7절과 8절입니다. 로마서 4:7-8절을 보면 여기서 바울은 시편 32:1절을 인용하며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불법과 죄라는 말은 허물과 죄가 번역된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과 분리를 일으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불러 일으키는 것들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죄는 받듯이 그 죄에 대한 죄책이 따른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들이 사라지고 그로 말미암아 죄책이 없어진 것입니다.

         다윗은 얼마나 행복한가 라고 감탄한 것은 바로 이것이 엄청난 복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함 받는다 가리어진다 라는 단어들을 모두 수동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 자신의 노력이나 수고로 인해서 얻은 능동적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이러한 용서와 덮어 가리우는 일을 하신 것입니까? 로마서 4:1절을 보면 바울은 여기서 아브라함을 예로서 제시합니다. 바울은 육신으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는가 라고 합니다. 육신으로 라는 말은 영적으로 라는 말의 반대어로 육체적 노력이나 육체적 능력으로 라는 의미를 말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라는 말로 바울은 아브라함이 자신 스스로의 힘이나 능력에 의한 어떤 행위로써 무엇을 얻었는가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자신이 행한 어떤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롭게 된 것입니까? 3절을 보면 바울은 구약 성경을 인용하는데 창세기 15:6절을 인용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의로 여겨진 바 되다 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믿음이 어떻게 의롭게 되어지는 가 하는 것을 가리켜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다는 피상적인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에 믿음이 구원에 있어서 만능이며 믿음이 저절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 자체가 어떤 능력이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여겨진 바 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겨진 바 된 이라는 단어는 수동형으로 여기다가 아니라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매우 중요한데 이신칭의 교리에 있어서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이신칭의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교리를 남용해서 내가 믿으니 의롭게 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겨진 바란 영어로는 impute 라는 단업니다. 이 단어는 전가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전가란 무엇인가를 어떤 사람의 계산에 옮겨 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누군가 계산상 부족한 금액을 채워주는 것을 의미하는데 내가 하지 않은 어떤 일이 마치 우리가 한 일처럼 뒤집어 씌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의를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덮어 씌우신 것입니다. 그의 의가 우리에게 옮겨져서 우리가 의롭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말은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해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우리 가운데 전가 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의로 여겨주시지 않으시면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해주시는 방법으로 인정하사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의해 우리의 불법과 죄가 용서와 가리움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벗어났으며 더 이상 죄책 아래 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예수 안에서 누리는 복이며 행복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행복합니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 예수께 전가하고 그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되어졌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21절을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고 말입니다.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를 죄로 삼으로 셨다는 말은 그에게 죄를 옮기시고 전가 했다는 말이지 그분이 죄인이 되어 죄를 지으신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어떻게 복을 받으며 행복해 질 수 있었는가 에 대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행복한가 라고 행복에 대한 비명을 지른 것은 허물과 죄의 처리 문제 만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허물과 죄에 대한 대가의 처리 방식에 대한 내용도 함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은 하나님께서 간단하게 처리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허물과 죄에 대한 대가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의를 전가해 주시기 위해서 누군가는 우리의 죄를 전가 받아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주심으로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 인해 죄와 허물에 대한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의로움을 전가해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죄를 짓는 일과 불법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멈추어야 하며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