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주 예수를 믿으라1 < 사도행전 16장 30절부터 34절 >

by 박경호목사 posted Dec 0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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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설교 영상은 음질에 오류가 생겨 올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한 간수의 회심과 그의 가족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사도행전 16 30절을 보면 오늘 우리가 초점을 맞추려고 하는 중심 주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간 사람은 옥을 지키는 간수입니다. 그는 옥 밖으로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나갑니다. 그리고 질문을 하는데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라는 것입니다. 이 물음이 중요한 것은 이 물음이 구원의 출발점이자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먼저 이 질문은 모든 인간들이 가지는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 특별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구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나 구원의 필요성을 인식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간수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라는 질문은 일반적이지도 않고 삶 가운데 던질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질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의미는 현재적 삶이 주는 고통에서의 벗어남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재의 삶 너머까지 바라보며 기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렇다면 이 간수가 질문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 대하여 입니다. 사도행전 16 31절 말씀을 보면 이 구절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하는 질문에 너무나 단순하고 명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면 된다는 이 말이 단순하고 간단해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이 즉 구원을 얻는 것이 간단하고 단순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주라는 단어입니다. 주 라는 단어가 헬라어에서 퀴리오스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주인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앞에 살펴본 30절을 보면 여기서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선생들이여 라고 하는데 여기에 사용된 단어가 바로 퀴리오스 라는 단어 입니다. 이 단어를 선생님들이라고 번역한 이유는 당시에 이 단어는 상대에 대한 극 존칭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31절을 보면 여기에서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주라는 단어가 앞의 30절에서 선생님으로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인 퀴리오스 라는 단어 입니다. 그렇다면 왜 한글 성경은 같은 단어인 퀴리오스를 주라고 번역을 하였을까요? 앞서는 존귀한 선생님이라고 번역을 했으면서 말입니다. 만약 이 구절에서 주 라는 단어가 선생님으로 번역된다면 바울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좀더 탁월한 인간 존중 받을 인간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예수에 대하여 존경심만 가지면 되는 것입니까?

         한글 성경에서 왜 퀴리오라는 단어를 31절에 주라고 번역을 하였는가 하면 이 단어는 사용 용도와 또한 이것이 지시하는 대상에 따라 문맥 속에서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이 단어를 사람에게 사용할 때에는 존귀한 선생이나 주인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성하고 인간을 초월한 존재 즉 절대자에게 부여될 때에는 이것은 신성을 가리키는 단어이며 신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경우 로마 황제를 주라고 스스로 지칭했으며 백성들에게 자신을 주로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주로 사용될 때에 신적 권위를 지닌 신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에서도 주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바울은 정관사를 붙여서 그 주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라는로써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신이라 불려지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유일한 하나님이며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란 호칭으로써의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예수를 믿는 다고 할 때 여기에서 첫째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를 믿으며 둘째 그분이 존재를 믿으며 셋째 그분의 행하신 일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 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21절을 보면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라고 합니다. 왜 예수 입니까?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불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름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누구시며 그분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그분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려 오신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것에 그분의 이름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분이 우리 자신의 죄를 위하여 오셨으며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라는 이름을 부를 때에 우리가 예수 라는 이름을 믿는 다는 것에는 내가 죄인이며 나를 죄에서 구원하려 오셨으며 십자가에서 그분의 나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인하여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믿어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가벼우면 가벼울 수록 삶도 가볍고 신앙 생활도 가벼워집니다. 삶이 가볍고 신앙 생활이 가볍다는 것은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떠한 신앙적 고민이나 자신의 믿는 것에 대하여 책임 있는 삶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복종하며 순종하는 모든 의무와 책임이 없기에 삶이 가볍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그의 삶에는 자신이 믿는 신앙과 믿음의 삶이 없습니다. 신자가 반드시 살아야 할 신자다움이 없는 삶을 살면서 바울이 말하는 주 예수를 믿는 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주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지금 현재의 삶이 주 예수를 믿는 삶입니까?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시며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 안에 다른 이는 다른 것은 없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참입니까?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참으로 믿으십시오. 당신은 진짜 그리스도입니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십시오. 가벼운 신자, 성경이 말하는 믿는 것과 상관없는 신자, 예수 모르는 신자가 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