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누가 내 이웃입니까 who is my neighbor <누가복음 10장 25절- 37절>

by YC posted Dec 0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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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 영상 https://youtu.be/kwzoAJfkVoE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불려지는 내용입니다. 이 본문은 두 개의 내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25절부터 28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한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대화에 관한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율법사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주시는 비유입니다. 첫 번째 내용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너도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대화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행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대화의 주제는 누가 내 이웃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단순하게 네 이웃은 이런 사람들이다 라고 정의하지 않으시고 하나의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다양한 의도적 가르침이 안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이제 30절부터 시작되는 이 비유의 내용들에 들어가서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먼저 왜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 주지 않고 피하여 돌아서 가버린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유 속에 등장시키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나쁘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의도적으로 이들을 등장시킨 것일까요?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까라는 질문을 하고 이 질문의 답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 두 개의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등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그 다음에 시간이 남고, 힘이 남고, 물질이 남으면 그때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고 말씀한 후에 이와 같이 라는 표현과 더불어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와 같이 라는 말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차별이 있거나 구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등장한 제사장 레위인이 거의 죽게 된 자를 피하여 간 이유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추측 가능한 것은 피하였다는 말에서 돕기 싫거나 혹은 부정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할 책임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지 않습니다. 또는 혹시 하나님을 섬기는데 부정할까 하여 피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무엇이 우선인가 하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우선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라고 질문 할 수 있습니다. 예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의미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 4:20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동일 한 것입니다. 누가 우선이고 나중이 아니며 어떤 것이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을 예수님이 등장 시키는 이유는 하나님께만 잘하면 된다는 치우친 신앙에 대한 경고입니다. 신앙이 한쪽으로 치우쳐 편협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면 된다는 생각에 다른 이웃을 돌보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며 돌보는 것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 속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 주는 한 인물을 등장시키시는데 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왜 다른 사람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키는가 하면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웃에 대한 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 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사마리아 사람은 사람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충격적인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님과 율법사의 대화를 통하여 알게 됩니다. 36절 말씀에 한글 성경은 이 부분을 잘 번역하였고 의미를 잘 살렸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는 말로 수동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자세히 생각해 보십시오. 강도 만난 자는 자신이 이웃을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은 선택된 것입니다. 즉 사마리아인이 적극적으로 이웃이 되어줌으로 말미암아 그는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웃은 필요를 원하는 사람에게 가서 되어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웃을 선택하고 정하고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웃을 그렇게 자신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를 원하는 자에게 가서 이웃이 되어 그들의 필요를 채우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인을 비유 속에 넣는 이유는 이런 이웃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 취향이 같고 성향이 같고 말이 통하는 같은 수준의 사람을 이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와는 맞지 않고 성향이 틀리고 수준이 다르면 경계하며 가까이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과 다 동일하게 친밀감을 가지고 가까이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주님은 우리의 이웃의 경계를 허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이웃이란 정해 놓은 어떤 부류가 아닌 어느 누구도 이웃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웃은 어떤 사람이 내게 이웃이 되기 위해 찾아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서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의 핵심은 행하라 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비유 속에서 행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두번이나 등장합니다. 율법사의 대답에서 그리고 비유 후에 율법사의 깨달음을 아시고 예수님은 그 깨달은 것을 행하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비유의 핵심은 행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깨닫고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좋은 이웃들이 되어야 합니다. 차타누가 지역에는 좋은 이웃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또는 도움이 그들을 회복하고 살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들의 이웃으로 부르셨음을 아셔야 합니다. 실천하십시오. 여러분이 이웃의 되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