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누가복음 11:1절>

by YC posted Jan 08,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설교 영상   https://youtu.be/1Gk8LigWoYU 


 누가복음 11 1절을 보면 제자들은 곁에서 예수님께서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일을 등한시 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오늘의 초점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구에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11 2절에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라고 하시며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이 제자들이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처럼은 아니라는 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기도가 아닌 바른 기도, 참된 기도를 가르치시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 기록된 주기도의 내용은 마태복음 6 9절에서 발견됩니다. 마태복음은 주기도문을 주어진 배경에 대하여 누가복음과 전혀 다릅니다. 마태복음의 경우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이 주어지기 전에 기도에 대하여 두 형태의 기도에 대하여 언급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두 형태의 기도는 모두 잘못된 기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거짓된 기도였습니다. 그 첫 번째를 보면 5절에서 외식하는 자가 하는 기도입니다. 이들은 기도할 때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너무나 원하며 사랑합니다. 남의 시선과 남의 평가와 판단을 무엇보다 중시하며 남이 자신을 알아주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욕망의 근거는 명성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을 만족하기 위하여 기도라는 형식을 빌러 온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두 번째의 거짓된 기도는 7절에서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이방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써의 기도입니다. 이방인들의 기도는 중언부언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중언 부언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같은 말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이유는 말을 많이 하여야 기도가 응답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생각은 누구의 생각입니까? 그들 자신들의 생각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이방인들은 가능한 오래, 가능한 길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담겨 있는 뜻은 정성입니다. 이방인들의 기도에 대한 가장 명확한 답은 지성이면 감천이다 입니다. 기도는 길고 오랜이라는 시간의 정성을 다하여 드리면 응답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 주님이 이러한 거짓된 기도를 앞에 놓는 이유는 이제 곧 자신이 가르쳐줄 참된 기도의 내용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기도가 아무나 할 수 있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주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거나 기도를 제대로 배우지 않게 되면 거짓된 기도, 잘못된 기도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짓된 기도와 잘못된 기도를 피할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6:18절을 보면 바울은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의 의미는 이렇게 표현하면 쉽습니다. 성령 밖에서 기도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령과 관련이 없이,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라는 뜻이 됩니다. 성령을 의지하거나 도우심을 받지 않은 상태가 바로 성령 밖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항상 이라는 표현을 하는 이유는 모든 기도는 바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드려져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로마서 8 26-27절을 보면 이 구절에 나타난 성령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것에서 연약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기도에 빠지고, 거짓된 기도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올바르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않고는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신학에서 기도에 대한 정의를 보면 기도란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하나님께 바르게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기도하기에 앞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입을 열어 여러분들의 필요를 먼저 내 놓기 전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여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왜 기도가 어렵고 힘든가 하면 바로 내 힘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내 인내력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왜 기도하면 할 말이 없고 1분이나 3분이 지나면 할 말이 없어지는 이유는 바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열어 기도하게 해 달라고 구하십시오. 기도의 문을 열어 달라고 구하십시오. 나에게 기도의 제목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우선이고 먼저입니다. 이유는 성령이 아니고는 우리 자신 스스로가 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아니고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의지할 수도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려 주시기를 그리고 무릎 꿇게 해 달라고 구하십시오. 이것이 우선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습관에 따라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기도하셔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분주함 가운데서도 기도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알다시피 바쁘고 분주한 사역 가운데서도 주님은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주님의 기도의 습관에 대하여 실제로 주님은 기도가 필요 없는데도 우리에게 보이시기 위하여 기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즉 주님의 기도는 우리를 교훈하기 위한 가르침을 위한 형식적 행위였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주님마저도 이 땅에 거하시는 동안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셨으며 기도를 통하여 힘을 얻으셨다는 성경의 주장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자신을 내려 놓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기도를 통하여 얻은 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5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육체로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분이신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다고 합니다. 한글 성경은 예수님께서 기도한 후에 응답된 것이 예수님의 경건이 이유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 구절의 원문의 의미는 경건이라는 단어는 두려움이나 불안을 의미합니다. 문법상 그의 라는 단어는 이 문장에 없습니다. 즉 예수님의 상태를 표현하는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단어만 있으며 이러한 상태에서 주님은 기도하셨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인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중요한 것은 주님도 십자가를 지기 위해 기도가 절실히 필요하셨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욱 절실한 기도가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