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안수 < 레위기 16장 21절 >

by 박경호목사 posted Sep 1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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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상  https://youtu.be/xwQLYpVmsAQ


오늘 본문을 봅시다. 21절에서 아론이 염소에게 두 손을 얹어 안수 합니다. 아론이 두 손으로 머리에 안수하는 염소가 아사셀을 위한 염소입니다. 아론이 두 손을 살아있는 염소의 머리 위에 놓은 후에 아론은 고합니다. 고한다는 말은 고백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고백하다라는 단어는 confess over로 안에 있는 죄를 적극적으로 고백하여 밖으로 던져버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즉 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고백하며 하나도 남김 없이 밖으로 끄집어 내는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신약적 의미는 우리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 앞에 남김없이 꺼내어 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를 남김 없이 사하시며 깨끗게 하실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날 아론은 이스라엘 모든 죄를 남김 없이 모두다 이 아사셀 염소에게 남김 없이 던져 넣습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의 눈에는 실제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행위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죄가 그 염소의 머리 위에 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염소는 정한 사람에 의해서 광야로 보내지게 되어 그곳에서 죽게 됩니다. 광야로 보내지는 이유는 아무도 찾을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곳으로 죄를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의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 지시고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가셨고 골고다 라는 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옮겨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어설프게 알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선 구약 성경이 안수라는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합시다. 먼저는 축복하는 경우에 있어서 안수를 합니다. 또한 반대로 저주와 심판의 경우에도 안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레위기 24:14절입니다. 안수가 이러한 의미도 있지만 안수는 제사에 있어서 그 의미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백성들이 레위인들을 안수 하는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 8:10절입니다. 아론이 레위인들을 여호와 앞에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로 그들에게 안수하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16절에서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자신을 위하여 구별하셨는데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 난 자들 대신으로 취하신 것입니다.

         레위기 1:4절을 봅시다. 여기서 머리에 안수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대제사장이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제사에 있어서 안수는 무엇인가 옮겨 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수를 할 때에 죄가 죄를 지은 사람에게서 옮겨 가는 것을 전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죄가 전가 된다는 것은 죄가 이동하거나 옮겨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제사를 드리는 자의 죄가 짐승에게로 이동하거나 옮겨 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나 이해는 성경의 다른 제사들에 대하여 문제를 발생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화목제의 경우를 봅시다. 레위기 3:1-2절 입니다. 만일 사람이 화목제를 드리려면 2절에서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여기서도 동일하게 안수합니다. 화목제라는 것은 죄를 사하기 위한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여기서 안수를 하는 이유가 죄를 사함 받거나 하는 죄가 짐승에게 전가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수하는 것이 단순히 죄가 전가 되는 즉 이동하거나 옮겨 가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대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레위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초태생들을 대신하였습니다. 대신이라는 말이 전가와 차이점은 전가는 제사드리는 자의 죄만이 옮겨가며 이동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transfer 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나는 이제 죄가 없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대신하다 라는 말은 죄가 옮겨간 것이 아니라 나를 상징하며 나를 가리키는 바로 내가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대신하여 라는 말은 내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대신하여 짐승이 죽은 것입니다. 그 짐승의 죽음은 바로 나의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죽어버리며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거나 다시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상징하고 나를 나타내는 짐승이 나를 대신하여 죽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통하여 죄인은 죄를 지은 자신이 죽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신약에서 이 부분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신지를 봅시다. 고린도 후서 514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대신하여 죽었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함으로 우리를 강권하여 우리를 위하여 살지 않고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는 대신하여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고 대신 죽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대신 죽으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나를 대체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죄인인 나입니다. 내가 죽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내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내가 아닌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으로 교체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구절을 더 봅시다. 갈라디아서 2:20절입니다. 이 구절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입니다. 전가는 절대로 못박히지 않습니다. 나는 그냥 있고 내 죄만 옮겨간 것입니다. 그렇기에는 나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내 죄만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대신은 내가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죽었고 그렇기에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사신 것은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육체가운데 사는 나는 누군인가 라는 물음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죽도록 사랑하시고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대신 주시기까지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단순히 내 죄가 그분에게 옮겨 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은 것입니다. 내 대신에 죽었다는 말은 내가 죽은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경험하지 못하면 신앙 생활이 죄만 없어지고 죄만 옮겨가서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는 착각 속에서 여전히 자신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왜 신자들이 신자답지 못하고 예수님을 닮지 못합니까 단순히 죄 문제가 해결 되었다고 거기에만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안 죽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을 위해서 삽니다. 죄만 옮겨 갔다고 믿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면은 여전히 바뀌지 않습니다. 성품은 여전히 세속적이고 이기적이며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불의가 가득합니다. 죽은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죽은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옛 모습 그대로 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못했을 때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죽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