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성령을 소멸치 말라 2 <데살니가전서 5장 19절- 22절>

by 박경호목사 posted Aug 2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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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상  https://youtu.be/9HyG1Z1V7Ks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칭찬받을 만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마케도냐와 아가야 지방에까지 퍼졌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서도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은 모범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뜨거운 열심과 본받을 만한 믿음을 가졌던 자들이 어떻게 성령을 소멸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데살로니가 전서 2 3절을 보면 이 구절은 세 개의 명사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간사, 부정, 속임수 라는 단어입니다. 간사란 잘못이나 오류라는 뜻입니다. 또한 부정이란 불결한 마음과 동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속임수란 화려한 말솜씨로 사람을 기만하고 속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 개의 명사가 의미하는 것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가르침의 내용에 있어서 그리고 그 동기에 있어서 그리고 행동 양식에 있어서 속이려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바울에 대하여 또한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비방하는 자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일들을 스스로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4절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가 전한 복음과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복음을 전함이며 이 복음을 전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의도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함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5절에서 그는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음은 사람이 마음을 맞추는 것이 아니며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내용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아무 때에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아첨의 말을 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복음을 통하여 자신의 유익을 얻으며 사람들을 조종하며 자신의 배를 채우며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삼으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짓을 바울은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3절부터 5절까지 한 말들을 생각해 보면 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성령을 소멸하고 예언을 멸시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말씀을 전하는 자들과 가르치는 자들과 성도들 안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과 의도가 아닌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며 교훈하며 권면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간사한 자들로 잘못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유혹하며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무엇을 따라야 할지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바울이 가르친 참된 진리 조차도 의심하며 믿지 않으려 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신뢰를 잃어 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성령이 소멸되어가는 이유를 우리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수 많은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 안에는 수많은 목사들과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벌어지는 일들이 바울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탐심이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위탁 받았다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시게 하는 말들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탐심을 가지고 탐욕을 품는 순간 그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탐욕스럽고 부패한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로 인하여 교인들은 점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실망하며 낙심하고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건축하는 교회를 바라보며 누가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짓과 속임으로 가르치고 교훈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누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상태에서 교회는 점점 성령을 소멸하게 되고 예언을 멸시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상태에서 바울의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교회가 교회 답지 않을 지라도 비록 성도가 성도 답지 않다 할 찌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의 말씀은 살아 역사하고 있으며 그 말씀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에게는 능력으로 역사하신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21절에서 이러한 명령을 합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는 것은 거짓이 난무하고 불의와 불법이 가득하여 무엇이 옳은 것인지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래서 성령이 소멸되고 말씀을 무시하려 할 때에 악이 우리를 이기지 못하게 그 가운데 헤아려서 좋은 것을 찾아 취하는 일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헤아리다 라는 말은 시험해 보아 참인지를 가려내다라는 뜻입니다. 즉 모든 일에 이것이 참된 진리의 말씀인지를 시험해보고 검증해 보아 구별해내야 합니다. 그래서 옳은 것만을 시험해보아 참된 것만을 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취하라는 말은 확고하게 붙들고 견고하게 지킨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참이면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을 굳게 붙들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성령을 소멸시키지 않고 말씀을 무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악은 어떤 모양이라고 버리라고 합니다. 그것이 시험해보았는데 참된 진리의 말씀으로 검사해 보니 거짓이면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합니다. 모양이라고 하는 것은 형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악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한 작은 흉내 조차도 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참된 진리가 왜곡되며 신앙 생활도 정상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를 등지기도 하고 교회에 하나님이 없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이러한 판단이 현실에 대한 바른 진단일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 답지 않다고 해서 교회를 방치하거나 우리도 저들과 같이 마음대로 탐심에 따라 행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을 상실하고 믿지 않는다고 우리 또한 그렇게 상실하여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고 응답 받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 또한 기도하지 않고 응답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지혜가 필요하며 또한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는 것이 오늘날 신자가 신앙을 지키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