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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맥의 첫 시작인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나아만이 자신의 왕인 아람 왕의 서신을 가지고 이스라엘 왕에게 온 후에 그 서신을 읽은 이스라엘 왕이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찢은 이유는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달라는 불가능한 요구를 하였기 때문이며 이것은 이스라엘을 침략하기 위한 빌미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는 말을 듣고 엘리사는 옷을 찢은 이스라엘 왕을 책망하며 그 사람을 자신에게로 오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말이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나아만이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 알기 때문에 자신에게 온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리이다 라는 말은 미완료 형으로 알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저가 이 후에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자가 있다는 말은 단순히 사람인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써 즉 정말 참된 신인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그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문맥의 마지막 구절을 살펴봅시다. 15절입니다. 이 구절은 문둥병을 고침 받은 나아만이 병 고침을 받은 후에 다시 엘리사에게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고백하는 말이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 동사가 내가 안다는 말입니다. 8절에서 엘리사는 그가 알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나아만은 내가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이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가 하나님을 알게 되며 그분이 온 천하에 유일한 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은 단순히 병이 치료되었다라는 것에 우리의 이해가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8절과 15절의 알 것이다 와 알았다는 말은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을 여는 열쇠입니다. 모든 내용은 이제 그럼 어떻게 나아만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답으로 연결 되고 있습니다. 이제 8절과 15절이 감싸고 있는 내용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는 두 가지의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 막고 있는 장애물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인간은 어떻게 그 장애물을 뛰어넘게 되는가? 하는 것이며 그 결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 왕으로부터 엘리사에게로 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집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 거느리고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나아만은 말들과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에 가서 그 문에 서있습니다. 나아만은 지금 전쟁터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또한 누군가를 위협하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말들 즉 기병대와 전차부대를 대동하고 마치 엘리사를 위협하듯이 그의 집 문에 서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인간 속에서 장애물이 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교만함과 오만함입니다. 수레에 앉아 기병대와 전차부대를 대동하며 마치 자신이 주인양 행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는 치명적인 문둥병에 걸렸음에도 자존심을 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높이 대우해 줄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능력과 힘을 의지하는 한 하나님께 전적인 굴복과 복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능력과 힘과 지혜를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며 믿고 있기에 하나님께 전적인 의존은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장애물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10절을 보면 엘리사가 사자를 나아만에게 사자를 보내어 말하는데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번 씻으라 라고 합니다. 이 말에 나아만이 진노합니다. 11절을 보면 이 구절은 앞에 세개의 동사가 연속으로 등장합니다. 첫번째는 나아만이 분노하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가 떠나갔다는 단어이고 세번째는 그가 말하였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연속으로 등장하는 것은 나아만이 지금 얼마나 화가나 있는지와 그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데 분노하고 즉각 떠나가며 화가 나서 큰 소리로 화풀이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증명해주는 단어가 연이어 등장하는데 한글 성경엔 없지만 원문에는 보라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즉 보아라 라는 단어를 통하여 그의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하였는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 나아만은 이토록 분노하며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것입니까? 엘리사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엘리사가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나아만이 기대했던 것을 하지 않은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11절에서 나아만이 분이 폭발한 배경을 보면 내 생각에는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해야 되 라는 자기 자신의 정한 룰이 있고 이렇게 해야 된다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알고 있는 방법과 방식으로 해야 된다고 스스로 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로 엘리사가 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아만이 스스로 정한 방법은 먼저 엘리사가 자신에게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건방지게 엘리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이제껏 보았던 모든 우상의 선지자들은 모두다 자신 앞에 나왔으며 자신 앞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문을 열어 보지도 않고 사자를 시켜서 자신에게 통보한 것입니다. 이것이 불쾌한 것입니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불쾌하고 자신을 높이지 않으며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기분 나쁜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영어 성경에는 원문의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데 반드시 나와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반드시 내게로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를 뭐로 보고 나를 그렇게 대접하는가 라는 인간의 자신에 대한 교만함과 자존심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두번째 동사에서 나타나는 것은 서다 라는 단어입니다. 그는 내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내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인이라는 사고를 버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장애물이 바로 내가 주인이라는 의식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하나님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세 번째 연속 되는 동사에서 보이는 것은 부른 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른 다는 것은 부르짖는 다는 것으로 나아만이 이제껏 이방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모습 속에서 그렇게 하던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이제껏 그런 선지자들을 보았고 그렇게 하는 자들을 보았습니다. 그가 보고 경험한 것은 모두다 우상에게 이렇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처럼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부른 다는 말에서 중요한 단어가 있는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입니다. 나아만은 여호와 하나님을 그의 하나님 즉 선지자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 알지 못하며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상에게나 하던 행위를 강요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생각한 것에는 두 손을 흔드는 것도 있습니다. 손을 환부 위에 두고 흔들며 병을 고치는 주술을 외워야 병이 낳는 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나아만이 이제껏 살아오면서 자신의 생각 속에 각인 되어온 세상의 신들과 그들을 섬기는 자들이 행한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얼굴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도 안 되게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번 씻으라고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인간 속에 있는 장애물은 이처럼 자신의 생각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은 이럴 것이야 라는 생각과 하나님이라면 이래야 돼 라는 생각은 하나님을 만나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신앙 성장에 저해 요소가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분 이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하며 알 수 있도록 성경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보혜사이신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 말씀을 이해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생각에 갇혀서 이래서 하나님을 못 믿겠어 이래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어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어 라는 말은 결국 나는 나의 생각에 갇힌 사람입니다 라는 말을 자인하는 샘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생각에 갇히고 교만과 오만함으로 가득한 나아만은 12절에 몸을 돌려 분노하며 떠나니 라는 말로 비극적인 결말로 이야기가 끝날 위기에 처합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며 하나님을 의존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하며 경험하며 인정하게 되는 것일까 하는 부분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13절은 나아만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입니다. 12절에서 몸을 돌려 분노하며 떠나니 이후의 내용을 보면 나아만은 떠나고 있습니다.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떠나가고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13)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그때에 그 종들이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합니다. 내 아버지여 이 말속에는 나아만을 향한 존경심이 높임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가 왜 분노하고 있는지를 그의 종들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는 나아만을 일깨웁니다. 만일 선지자가 당신에게 명령하며 큰 일을 행하라고 했다면 당신은 행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당신에게 단지 씻어서 깨끗하게 하라는 말을 왜 못하겠습니까? 라는 말입니다.

         종들의 말은 너무나 타당하며 정확한 말입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지식적 사고에 근거하여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인해 분이 나고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엘리사의 말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쉬운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는 그는 자신의 사고에 갇혀 그것을 외면하고 화를 내며 떠나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14절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번 몸을 잠그고 문둥병에서 자유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 13절의 내용은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천하에 유일한 신이라고 고백하게 된 이유가 담겨 있는 구절입니다. 13절에서 종들이 나아만에게 나아와 하는 말에서 우리는 결코 신앙적 용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 담겨 있는 의미 속에서 당신은 선지자의 말에 순종해야 하는 촉구를 보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람이 더 큰 것도 하라고 명령했다는 당신은 그것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 작은 것에 왜 순종하지 않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것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의 말에 대한 것이며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에는 나아만이 어떻게 종들의 말에 따르게 되었는가에 대한 내면적 변화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타오는 분노를 순식간에 가라앉히며 갑자기 그의 마음의 태도를 돌이켰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종들의 말의 논리가 먹혀 들어갔거나 혹은 나아만은 원래 타인의 말을 경청 할 줄 아는 인격의 사람이었다는 말은 개연성은 잊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8절에서 이미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그가 하나님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을 분명히 경험할 것이며 분명히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들이 분노하며 화를 참지 못하고 돌이켜 떠나는 나아만 앞에 감히 막아 서게 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가 준 것이며 그들이 나아만을 설득하게 할 수 있는 지혜의 말은 누가 그들 안에 준 것이며 그 말을 듣고 순식간에 분노가 사라지고 순종의 마음으로 바뀌게 된 것은 누가 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고백하며 그분께 순종의 삶을 살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을 때에만 그렇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그리스도를 주라 할 수 없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며 나아만처럼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다는 고백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아만의 이야기는 나아만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을 예배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입니다. 스스로 그분을 알지 못한 채 제한된 자신의 사고에 갇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주인행세를 하며 살던 우리에게 참된 주인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의 교만함과 오만함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얼마나 무익한 존재이며 우리의 자랑이 헛된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셔서 새로운 인생 가운데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분을 알게 하며 그분 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고백을 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입술을 제어 하는 지혜 < 잠언 10장 19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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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계시록 강해 42 < 천년왕국 > 목요 기도회에서

  3. 게으른 자의 정욕 <잠언 21장 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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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계시록 강해 41 < 천년간 용의 결박 > 목요 기도회에서

  5. 게으르지 말라 < 계시록 2장 3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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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계시록 강해 40 <악의 세력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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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계시록 강해 39 < 할렐루야 합창 > 목요 기도회에서

  8. 수고와 수고 < 전도서 1장 1절부터 3절 >

  9. 식초와 연기 같은 게으름 < 잠언 10:26절 >

  10. 게으름이란 < 잠언 26:1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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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계시록 강해 38 <세 애가와 심판의 참상> 목요 기도회에서

  12. 뉘우침 < 마태복음 21:28-3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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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계시록 강해 37 [ 강하신 하나님] 목요 기도회에서

  14. 선악을 아는 일 < 창세기 3장 22절부터 2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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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계시록 강해 36 [ 음녀와 짐승의 비밀] 목요 기도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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