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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을 가리켜서 주목시키기 위해서 예수께 가까이 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자랑하고자 하는 그 성전 건물들을 가리키며 너희가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질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언은 제자들에게는 큰 충격과 놀라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성전을 자랑하려는데 오히려 그 모든 보이는 것들이 완전히 파괴되고 무너지리란 말을 듣는 것은 말하고자 하는 이들을 머쓱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에 떨도록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자리에서 어느 누구도 감히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3절을 보면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라고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물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절에서 제자들의 질문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어느 때에 이런 일들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일들이 가리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 건물들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는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질문은 그 징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그 징조는 주의 임하시는 것과 세상 끝에 일어날 것을 가리킵니다. 즉 언제 성전 건물들이 파괴될 것인가와 주님이 오시고 세상이 끝날 징조에 대한 물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4절부터 36절까지 답변하십니다. 그러나 4절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답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언제나 예수님은 그냥 답만 던져 주시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제자들의 질문을 교정하시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잘못된 질문일 때에 예수님께서는 답변 속에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시며 고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느끼고 있는 종말에 대한 임박성에 대하여 수정하십니다. 세상의 끝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 하라고 하십니다. 5절에서는 주의 해야 하는 이유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와서 자신이 그리스도라 하고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는 난리와 소문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라고 합니다. 7절을 보면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라고 합니다. 마치 이러한 일들이 세상의 끝이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뿐만 아니라 세상 끝의 징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이러한 무시 무시한 일들이 일어나겠지만 아직 끝이 아니며 오히려 이러한 것들은 재난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재난의 시작이라는 말이 세상 끝에 일어날 일들의 시작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앞의 내용과 반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나 라는 접속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재난의 시작이라 라는 것은 4-7절까지의 일들이 일어날 것이지만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재난의 시작이라는 말은 고통의 시작이라는 뜻으로 이 고통은 여인이 출산 할 때에 산통을 가리키는 말로 이제 산통이 막 시작되었으며 아직 아기가 나오려면 멀었다는 것입니다. 미혹하는 자들이 나타나 미혹하려고 할 것이며 난리 즉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들을 것이며 이것들이 두렵게 할 것이며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며 곳곳에 기근들과 지진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통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제자들의 임박한 세상 끝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십니다. 그리고 9절부터는 14절까지는 이제 직접적으로 믿는 자들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설명하십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끝이 오기 전에 살게 될 모든 신자들이 당하게 될 일들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때에 신자들은 환난에 넘겨질 것이며 죽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인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 때문에 신자는 세상에서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신자가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10절을 보면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라고 합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빠집니다. 시험에 빠진 다는 말은 넘어진다는 뜻으로 죄에 빠진 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느 일정기간의 영적 침체를 말할 수도 있으나 아예 믿음의 공동체에서 떠나 신앙을 저버리는 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신앙을 포기하는 일들이 발생할 것이라는 점은 우리가 얼마나 신앙 생활하기 어려운 시대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는가는 9절의 환난과 죽음 때문이며 민족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워하기 때문에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서로는 이방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 끼리 그렇게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잡아 준다는 말은 서로를 배반하여 권한을 타인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미워하다는 말은 서로를 몹시 싫어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몹시 싫어할 뿐만 아니라 증오까지도 나아가는 것이 바로 이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서로를 배반합니다. 교회가 교회를 대적하고 다투며 싸움을 합니다. 서로 미워하며 증오하기 까지 하고 몹시 싫어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끼리 그렇게 하며 서로 살겠다고 서로를 핍박하며 서로를 고소하며 서로 싸웁니다. 한국에 주차장 문제로 교회가 교회를 고소하고 다투며 성도 문제로 싸우고 다툽니다. 한 건물에 여러 교회들이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 싸웁니다. 서로를 미워하고 인사하지도 않습니다. 서로를 헐띁으며 비난합니다. 정말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그래서 고민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회의 감을 느끼고 절망감을 느끼는 이유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부에서 참된 신자됨의 모습들이 없어지고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끝이 오기 전에 자연스럽게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12절 말씀입니다.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종말의 때가 오기 전 신자들에게 일어날 위험스러운 일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는 것은 신자들 가운데 적은 자들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은 관계가 소원해지며 멀어져서 단절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랑이 그 대상으로써 가리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고 이웃입니다. 먼저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애정과 헌신이 식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말이 오기 전 사람들은 점점 식어져서 하나님을 더 이상 찾지도 않고 구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식어져서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한국 교회를 보면 예전의 열정이 식어져 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자 했으며 전심으로 섬기던 모습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몇 십리를 걸어가 예배를 드리던 헌신이 멀다고 귀찮다고 점점 등한시 되고 있으며 구겨진 돈을 다리미로 다려 하나님께 드렸던 정성이 식어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무릎을 꿇고 드렸던 예배의 모습에서 어떠한 경외감도 없는 무표정하며 무관심으로 드려지는 예배로 바뀌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참석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눈 도장만 찍고 가는 자들로 바뀐 것은 정말 사랑이 식어진 것입니다. 예배에 일찍 와서 누구보다 앞자리에 않아 기도로 준비하며 은혜를 사모함이 식어져 기도할 때 들어와 축도할 때 돌아가는 형식적인 예배 참석자들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식어져 가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른 다는 것이 더욱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우리가 더욱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식어진다는 의미는 저절로 차가워 지는 것이 아닙니다. 불어서 차가워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식히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뜨거워지지 않고 점점 차가워 지도록 찬 기운을 불어 넣어 뜨거움을 잃어 버리고 결국에는 차디찬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랑을 차게 만들도록 찬 기운을 불어 넣게 합니까? 예수님께서 불법이 성함이 그 차게 하는 기운이라고 합니다. 불법이라는 것은 법을 깨뜨리는 것이며 법을 어기며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법은 무엇입니까? 누가 만든 것을 깨뜨리며 법을 거스르며 대적한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가리키는 법은 하나님의 법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끝이 오기 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며 깨뜨리며 지키지 않고 무시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부분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합니다. 성한다는 것은 증가시킨다는 것입니다. 불법이 증가하여 점점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사랑은 점점 여기서부터 불어오는 찬 기운에 사랑이 식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불어서 차가워지게 하는 이 불법의 증가는 어떻게 발생되는가 하는 부분을 이해해야 합니다. 불법이 증가하며 점점 불어나게 된다는 것은 삶의 스타일, 삶의 방법과 삶의 모습이 하나님의 법과는 전혀 상관없어 지는 것인데 이것은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이 말하고 있는 자들은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신자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고 하는 자들인 동시에 믿겠노라고 고백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그 법 없이 사는 삶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죄의식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점점 더 냉담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식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법을 어기면서도 거리낌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삶의 원리로 삶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1절을 봅시다. 11절을 보면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데 계속해서 등장하는 단어가 많이 라는 부사입니다. 많이 일어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거짓 선지자의 출연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는 복음서에 계속 등장 할 뿐만 아니라 서신서에도 경고하고 있음을 봅니다. 거짓 선지자라는 말은 "신적 예언이라는 이름하에 거짓말을 해대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들먹여 거짓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를 새겨들어야 합니다.

         11절에서 예수님께서 경고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일어남은 12절에서 말하고 있는 불법의 성함과 그로 인해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짐과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12절에서 불법이 성한다는 말에서 원문에 주어가 없습니다. 그 의미는 앞 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주어가 되는 것입니다. 즉 불법이 성행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거짓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미혹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왜곡함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불법을 자행하도록 조장할 뿐만 아니라 권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속아 불법을 행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불법의 성행으로 말미암아 점점 사랑이 식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이 진리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무엇이 참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교회라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교회 지도자라는 자들의 모습 속에서 혼란스러워합니다. 교회가 너무나 세상적이 되고 세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세상의 사업을 하듯이 교회가 사업을 키우듯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법을 어겨도 되고 사람을 속여도 됩니다. 거짓말과 불의를 행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런 것쯤은 괜찮다고 합니다. 교회 예배당 건축을 위해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너무나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작은 교회를 섬기는 쓸데 없는 짓을 하지 말고 큰 교회를 섬겨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은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들 아래서 성도들은 불법의 만연함을 보며 회의를 느끼고 교회를 떠나던지 혹은 동참하여 함께 죄악을 즐거워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 없는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이 식어지고 자신의 자아와 욕심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많다 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시는 것을 주의 깊게 들으셔야 합니다. 종말의 때가 이르기 전에 일어날 일들이며 이것은 종말에 대한 사인이 아닙니다. 그전에 있을 일들이 오늘 우리의 삶에 있는 것입니다. 점점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것을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옆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던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다투며 물고 뜯고 하며 심하게 미워하며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서로를 고발하며 넘겨주며 시기와 질투로 싸울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미혹될 것입니다. 신앙 생활 잘한다고 믿었던 자들이 열심이 있다고 생각했던 자들이 넘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식어지고 차가워지고 냉담해 질 것이며 불법을 행하며 즐거워하며 행복해 하며 그 안에서 자유롭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탐욕과 욕심이 그의 마음에 가득하여 그것으로 만족을 삼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을 섬기며 자신이 주인 되어 자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신앙 생활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 없이 말입니다. 그 안에는 참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13절입니다.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끝까지 견디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참으로 구원을 얻은 자는 참으로 주님을 만나며 진리를 경험한 자는 끝까지 견딜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무너져 가도 함께 신앙 생활 하던 자들이 식어져 가도 그는 끝까지 그 사랑을 놓지 않을 것이며 그 열정이 식지 않게 할 것입니다. 어떠한 불의나 불법에도 그는 굴하지 않으며 실망하지 않을 것이며 헛된 소리와 이야기에 눈을 돌리지 않고 믿음을 지켜낼 것입니다. 견디다는 의미는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누가 주님 앞에 남아 있을 것인가 그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변이 어떠하든지 사람들이 어떠하든지 누가 뭐라 하든지 주님 안에 남아 있으십시오. 주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세상이 미쳐가고 있으며 사람들이 떠나 가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 끝까지 머물러 여러분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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