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사랑에 대한 착각 요한복음 3장 14절부터 18절까지

by 박경호목사 posted May 0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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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구절은 일반적으로 16절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나며 구원의 필요성을 잘 말해 주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이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냐는 것에 있습니다. 16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이유에 대하여 입니다. '이는'이라는 말은 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간과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라는 말은 멸망이라는 것이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놓인 상태라는 진술입니다. 멸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입니다.

         요한복음 3 16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진노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진노가 우리 위에 부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1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께서 나무에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의 감정과 감성을 터치는 수준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실천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무엇인가를 일으키며 발생시키는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독생자의 죽으심을 일으키는 실제적 행동을 유발하며 발생시키는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에 품은 감정이나 생각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마음을 벗어나 행동을 유발시켜 행위로 증명되어져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이 방법에 대한 것임을 말하는 것임을 증명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은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 본문에서 사람들은 이처럼이라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도에 대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처럼은 사랑의 정도로써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는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게 되면 해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정도로 사랑하셨느냐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처럼은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처럼이라는 단어의 용법을 보면 한글에서 "이처럼" 이라는 단어는 부사입니다. 그 의미는 눈앞의 사람이나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를 가리키거나, 앞 내용의 양상을 받아 뒤의 문장을 이끄는 말입니다. 헬라어에서도 이 단어의 사용 용례는 항상 앞 내용의 양상을 받아서 뒤의 문장을 이끕니다. 앞의 내용은 14절의 나무에 달린다는 말씀입니다. 즉 본문은 이렇게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무에 달려 죽게 하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이런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만이 우리를 용서하시며 사랑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것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우리의 죄는 절대로 우리 스스로나 우리에게서 나온 어떠한 헌신이나 봉사나 희생으로도 사죄 받을 수 없는 절대적 최악의 상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본문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제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에 대한 오해입니다. 16절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세상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이라는 것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며 범위가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세상을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합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을 그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세상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몇 가지로 구분이 되는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의 세계와 또한 다른 피조물들을 제외한 인간의 세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사탄이 지배하는 곳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은 이것들 가운데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먼저는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이유는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라는 말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요청되고 있기 때문에 피조물 세계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자 불신자를 모두를 가리키는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세상은 분명히 인간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인간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특정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전체의 구절에서 반복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믿는 다는 말입니다. 믿다 라는 단어가 총 5회 등장합니다. 15절을 주목하여 보면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에서 "이는" 이라는 말은 무엇 하기 위하여 라는 뜻입니다. 즉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인자도 들려야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이유는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16절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심으로 영생을 얻게 하려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세상은 누구를 말하는가 하면 바로 15절의 저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16절은 14절과 15절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을 자들을 가리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기에 또 다른 이유를 말해 줍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여전히 주인이시지만 한시적으로 악한 세력에 의해 타락한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자연적 인간의 상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라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1:21절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전에 우리는 악한 행실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으며 또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봅시다. 8: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합니다. 이 말은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귀 곧 사탄의 다스림 아래 있기 때문에 사탄의 자식이 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세상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16절에서 멸망치 않고 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은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그것이 확정적인 것은 18절 말씀에서 그 근거를 찾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이 구절에서 심판이라는 말은 정죄로 바꾸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즉 죄인으로 확정되어 선언된 사태를 가리킵니다. 믿는 자는 죄인이 아니라고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죄인으로 확정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구절들은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이며 우리를 사랑하신 성부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며 감히 기대할 수 없는 은혜인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깊이와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가 교차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신자는 한량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