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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벳새다라는 동네에 이르셨을 때에 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고쳐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손을 이끌어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아가십니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안수하셨습니다. 그 후에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눈먼 사람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우러러보며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이 보입니다. 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그의 눈에 안수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주목하여 보며 이제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갖는 질문은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 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왜 더럽게 침을 뱉으셨냐는 물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침을 뱉으시는 것이 모욕이나 혹은 더러운 일로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님 당시를 비롯하여 중세에도 사람의 침을 병을 고치는 약으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왜 두 번의 치료행위를 하셨는가?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두 번의 치료과정이 필요했다고 우리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본문을 만났을 때 가져야 될 자세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의미가 있으며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행위는 교훈과 가르침을 위한 의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르치려 하시며 누구를 가르치시기 위함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이 두 치료 과정은 보는 것에 대한 과정입니다. 보인다고 하지만 완전히 보지 못하는 상태 그리고 이제 완전히 보는 상태입니다. 마가는 왜 벳새다의 맹인이 눈을 뜨는 사건을 여기에 기록했을까요? 그 앞에 있는 내용을 좀 살펴봅시다.

         앞의 내용은 8장은 칠병이삼어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한글 성경에는 작은 생선 두어마리 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두어 마리라는 말은 두 마리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물고기가 복수이기 때문에 두어 마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힐난 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뱃새다로 건너 갑니다. 제자들과 배를 타고 건너 오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8:15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고하시는데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이라는 말을 빼고 잘못 듣습니다. 제자들은 계속해서 떡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8:17절에서 알아 듣지 못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라고 합니다.

         여기서 알다라는 말은 인지하다 알아채다 라는 뜻으로 마음은 인지 공간이기에 마음을 바꾸다는 뜻입니다. 이들의 마음은 아직 완전히 바뀐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의 누룩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직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데 마음이 바뀐 것이 아닌 상태인 것입니다. 깨닫지 라는 말은 이해하지 못했느냐 라는 말이며 둔하다는 말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말로 마음이 이렇게 딱딱하게 굳어서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무슨 의도로 이야기 하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18절에는 오늘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힌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냐고 묻습니다. 18절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주 못 보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본다고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안다고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보는 것이 신통치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본다고 하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의 제자들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 되는 사람이 바로 뱃새다의 맹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뱉으시고 안수 하시고 묻습니다. 묻지 않아도 되는데 예수님께서 굳이 묻습니다. 묻는 질문도 네가 무엇을 보느냐 입니다. 24절을 보면 이 사람이 우러러보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쳐다보고 있는 상태에서 라는 말입니다. 그는 마치 보이는 것처럼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 말 자체로는 이 사람이 눈이 완전히 뜨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을 보면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봅니다. 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를 보면 이 사람의 상태를 좀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나는 사람들을 봅니다. 라는 말에서 보다는 말은 영어의 see입니다. 그냥 어떠한 상이 눈에 비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뒤의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라는 말에서 보다는 다른 단어로 눈의 기능에 강조를 둔 의미로 시각의 기능적 차원에서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상태입니다 라는 의미로 완전히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안수 하셔서 완전히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맹인을 향한 두 번의 치료 과정에서 첫 번째의 상태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제자들의 현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맹인의 치료를 통하여 제자들을 교훈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들은 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마치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을 보는 상태인 채로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심각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첫 번째 치료를 받은 상태의 이 사람은 맹인 입니까? 아니면 맹인이 아닙니까? 본다고 하니 맹인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다니는 상태를 보고 있는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아주 헷갈리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는 때에는 신자처럼 보이다가 어느 순간에는 신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것은 타인에게 보이는 것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도 그렇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해 볼 때에 내가 믿는 자인지 아니면 믿지 않는 자인지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고 하는데 예수를 믿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 삶은 살지 못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라고 믿지만 그러나 유일한 구세주이며 구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말씀은 우선 순위가 아닙니다. 이들이 여전히 세상적이며 세속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필요성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만큼 자신이 죄인 됨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둘째로 이들은 예수 믿는 것에서 오는 행복과 기쁨을 얻지 못하여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나쁠 것이 없고 좋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예수를 믿는 대로 오는 영적 기쁨은 맛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예배가 기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신앙 생활 자체가 힘이 되지 않고 의무적이 됩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도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영적 절박성이 이들에게는 없습니다. 제대로 보지 못하기 자신의 영혼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채 신앙 생활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온전히 보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자신의 상태를 직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무엇을 보느냐는 말에 맹인은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본다고 자신이 보고 있는 상태를 정확하게 말합니다.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있는 상태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자신을 보십시오. 나는 정말로 보고 있는가? 신자답게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다음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으로 절망하거나 포기하거나 그대로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그러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맹인의 눈을 두 번의 치료 과정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은 너희의 상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너희가 고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는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보지 못하느냐 라는 말은 보아야 된다는 것이며 너희 눈이 온전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보시고 말씀을 온전히 보셔서 신자답게 바뀌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여러분 자신을 예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두 번째 안수 하실 때에 이 사람은 의탁합니다. 의탁이란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나는 보기를 원합니다. 제대로된 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신자가 누리는 참된 행복을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 가운데 있기를 원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서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라는 고백과 함께 그러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께서 맹인의 눈을 온전케 하신 것처럼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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