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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영상 https://youtu.be/5x1Ruaaf-4Q


죄가 없을 때, 즉 거룩할 때에 인간은 하나님이 중심에 있었고 하나님만을 기뻐하며, 하나님만을 즐거워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욥기 120-21절을 보면 [욥이 일어나서 겉 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합니다. 겉 옷을 찢고 머리털을 미는 것은 그가 큰 고통과 슬픔이 그의 마음을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한날 한시에 자신의 10명의 자녀가 죽습니다. 또한 거부였던 자신의 재산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심지어 하늘에 불이 내려와 태워 죽입니다.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었으며, 10명의 자녀를 잃은 부모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땅에 엎드려 예배를 드립니다. 왜 이렇습니까? 왜냐하면 그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 그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절인 욥기 122절을 보면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그는 죄를 짓지 않은 것입니다. 죄는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그분이 주인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자신을 마음의 기쁨을 목적으로 삼고, 자신의 마음의 즐거움을 목적으로 삼으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육신적 삶이라고 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것은 죄가 그를 지배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7 21-22절을 보면 여기서 바울은 한 법을 깨달았다고 하며 자신 안에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한 다른 한 법 즉 힘이 있는데 바로 악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자 안에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존 오웬에 의하면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가 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선에 대적하기 위해 갖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첫째는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영적으로 선한 일을 하도록 의지를 이끄는 은혜의 원리에 맞서 선한 것에 대한 적의를 품고 의지를 악으로 이끄는 반대 원리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악은 항상 신자의 내부에서 선을 행하였을 때 일어날 결과를 항상 대적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 23절을 보면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은 죄의 법 즉 힘으로 내 마음의 법과 즉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일어난 하나님의 일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죄의 힘에 눌려서 죄에 이끌리게 되며 죄의 지배 아래로 사로잡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자가 선을 행하려 하지만 그것이 결과로써 밖으로 나오는 것이 자꾸만 실패하거나 그 의지가 무너지거나 주저 앉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신자의 선에 대한 의지를 꺾기 위해 온갖 방해 전략을 구상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죄는 선을 행하려 하는 의지가 발동할 때에 함께 움직이며 가장 가까이에서 방해하며 훼방을 놓을 뿐만 아니라 그 의지가 꺾일 때까지 부단이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봉사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또한 열심히 예배와 모임에 참여하고 정기적으로 성경도 읽고 있습니다. 이때에 마음에 봉사하는 자신이 자랑스럽고 뿌듯하며, 남들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마음에 일어나 자신을 기뻐하며, 높이고자 하는 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한 경건한 삶을 사는 자신을 대견해 하며, 이러한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이 인정하며, 의롭다고 하실 것이라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경건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높이며, 나의 의로움의 증거로 삼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죄는 선을 행할 때에 내가 한 것이 아니며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사실에서 자신이 가치 있으며, 나은 존재이며, 하나님이 사랑하실 만한 존재라는 교만이 일어나 모든 선을 바꾸어 하나님 앞에 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자가 안일한 가운데 또는 집중하지 않고 온 마음을 기울이며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려는 의지에 힘을 불어 넣지 않으면 곧 무너질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될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내재하는 죄를 대적하는 신자도 끊임 없이 싸워야 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의 이러한 영적인 싸움의 모습은 갈라디아서 5 17절에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둘이 내 안에 있으며 이 싸움은 순간 순간 일어나며, 우리의 육체가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관련되어 성경은 신자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은 신자가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어 영속적 지배 가운데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9절을 보면   요한이 그도 범죄하지 못한다고 표현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그 안에 새로운 생명의 씨가 그 속에 있고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 후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것은 예전 것과 전혀 다른 것이며 예전 것에서 나온 어떤 변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의 좀더 명확한 의미는 새로운 창조물 입니다. 피조물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새롭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좀더 들어가보면 새로운 이라는 단어가 카이노스 라는 단어로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영어에서 new renew는 다르듯이 new는 없던 것이 새롭게 창조된 것입니다. 헬라어의 네오스라는 단어가 바로 new입니다. 그러나 카이노스는 있던 것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renew에 가깝지만 질적으로 새롭게 형태나 내용에 전에 있던 것과의 비교에 있어서 완전한 새로움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에서 알게 되는 것은 신자는 새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예전과 다른 존재인 것입니다. 새 창조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것이 신자가 가지고 있던 것에서의 변형이나 바뀜이 아니라 완전한 다름이라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또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을 단순히 바꾸거나 새롭게 한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기에 창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에 종 노릇하거나 죄의 완전한 지배 가운데 살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죄의 유혹과 죄로 인하여 넘어지거나 죄를 범한 다고 해서 그 안에 새롭게 된 그의 본성이 변하거나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상태를 요한은 하나님께로 난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죄가 신자에게 고통을 주고 강한 힘으로 협박하며 궁지에 몰아넣고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강요하며 짓누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신자가 하나님을 버리고 죄의 노예로 전락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두신 생명의 씨가 죄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을 뿐만 아니라 신자 안에 계신 성령이 신자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신자와 불신자의 진정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죄를 짓습니다.신자라고 해서 죄를 짓지 않거나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불신자와는 전혀 다르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으며, 죄의 이끌 속에서 자신을 죄에게 내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서 죄를 향한 태도와 자세에서 전혀 다르며, 죄가 신자와 불신자를 대하는 방법과 방식에서도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주일에 교회를 가느냐 안 가느냐가 아닙니다.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기에 본질적으로 다르며 그 마음의 상태가 영혼의 상태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신자는 내적 존재 자체가 불신자와 전혀 다릅니다. 신자들 속에는 성령이 계실 뿐만 아니라 그분으로 인하여 그의 마음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의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선이란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행동을 가리키며 그분을 만족시기고자 함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신자의 내적 상태는 그들의 성향이 변화된 것입니다. 성향이란 무엇인가를 향하고자 하는 의지를 말합니다. 무엇을 하고자 하거나 하지 않고자 하거나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향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향은 그 존재 자체가 어떤 결정권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성향에 영향을 미치는 경향에 의해서 성향은 항상 결정을 하고 의지적 행동을 하게 됩니다.

        경향성을 정의한다면 경향이란 방향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 또는 어디인가를 향하는 방향성인데 아담의 범죄 후에 인간의 방향성인 경향은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잃어버리고 길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경향성은 죽어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인 죽음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또한 영광을 돌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생각은 허무하여 지고 미련한 마음은 어두워 졌다는 로마서 1장의 말씀과 같은 상태인 것입니다. 또한 창세기 6장에서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다 라는 표현 또한 인간의 경향성이 악으로 치우쳐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들에 완전히 기울어진 상태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불신자란 여전히 그 경향성이 죄에 기울어져 있음으로 인해 항상 그들 안에 있는 성향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미워하며,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적의가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 안에 있는 마음의 상태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의도적 왜곡과 인정하지 않음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불신자는 단순히 예수를 믿지 않는 자이거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가 아니라 그 마음의 경향성과 그로 말미암는 성향이 항상 하나님과 반대 방향에 있는 자입니다. 성경이 왜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매지 말라는 이유의 깊은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과 보조를 맞추거나 함께 일할 수 없는 이유는 착하지 않아서도 성실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문제는 근본부터 마음의 상태와 영혼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차이점으로 죄는 불신자에 대하여 절대로 싸우지 않으며, 다투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미 그의 마음의 경향이 죄의 지배아래 있기에 죄의 성향 외에는 어떤 것도 그의 마음에 죄에 대하여 저항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는 죄의 노예이기에 어떠한 반항도, 거부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죄를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쾌락을 더욱 추구함으로 죄의 낙을 사모합니다. 불신자는 그의 마음에 죄를 이루며, 죄의 뜻과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며, 의미로 삼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대적할 마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신자에 대한 죄는 포기 하지 않으며,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도 넘어뜨리며,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를 향한 죄의 공격은 쉼이 없으며, 멈춤이 없으며, 중단함이 없습니다. 죄는 시도 때도 없이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향하게 하며, 믿음에서 불신과 의심으로, 평안에서 불안과 불평으로 이끌도록 역사합니다. 그렇기에 신자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으며, 핍박을 받으며, 쫓기며, 싸우는 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삶이 나그네의 삶인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우리의 본향인 천국을 사모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이 왜 안식의 장소인가 하면 바로 그곳은 죄가 없기 때문이며, 이 땅의 모든 수고 즉 죄와의 싸움이 끝이 나기 때문에 평안의 장소이자 참된 쉼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싸움에서 끝까지 승리하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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