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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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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위험에 빠지도록 위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미 앞서 말씀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만 이러한 위험이 해당되기 때문에 앞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이미 신약 성경이 쓰여지던 초대 교회 당시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위험에 노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이들이 이러한 시험에 빠져 믿음에서 파선하였거나, 잘못되고 왜곡된 신앙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에는 첫째로 배교를 들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3절을 보면 배교라는 말은 한자적으로는 믿던 종교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단어도 기본적으로는 이와 같은 뜻을 가지는데 진리를 저버림, 버리다, 배신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근을 보면 좀더 이 문제가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데 배교라는 단어는 이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영적 혼인 관계에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신랑이 되시고 그리스도인은 신부가 되어서 영적인 연합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교는 그러한 혼인 관계를 청산하고 이혼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신자의 신앙을 위협하는 또 다른 문제로 둘째는 이단 사상의 가르침과 그것을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입니다. 베드로후서 21절을 보면 베드로는 구약에서 백성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 가운데 일어났던 것은 그때에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단이란 한자적 의미로는 다를 이 끝단으로 같아 보이지만 마지막이 다른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도 너희 중에 라는 표현 속에서 이단은 교회 안에서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앙 고백 즉 교리가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특정한 부분에서 왜곡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을 정의하자만 기독교 신앙의 교리를 고수하지만 어떤 특정한 교리라든지 신앙의 어떤 부분에 대하여 그릇되어 나아가는 자들 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는 이단의 특징으로 표현되는 또 다른 것이 있는데, 가만히 끌어 들이는 이들의 행동입니다. 가만히 끌어 들이다 라는 헬라어 단어의 뜻은 한쪽으로 인도하다 라는 뜻으로 비밀스럽게 소개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이단에 속한 자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훈계라는 말은 타이르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경고의 의미가 더욱 강합니다. 그런 후에도 듣지 않게 되면 다음 단계는 멀리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거절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거부하는 마음도 포함된 것입니다. 이들을 거절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533절을 보면 동무라고 표현된 단어는 교제를 의미하는데 악한 자와의 교제는 선한 행실을 더럽히기 때문에 그러한 자들을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세번째로 앞의 것들보다 더 위험하고 더 인지하지 못하는 위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먼저 골로새서 26-7절을 보면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다시 각인 시키고 있는데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믿음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로 믿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나의 주인으로 영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에 나오는 것들이 가능하며, 필요해 지는데 그 안에서 행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고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되 신자의 고백이며, 필요한 상태이며, 해야 될 일들입니다. 신자가 건강하고 강건하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움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훈을 받음으로 믿음에 굳게 서야하며, 넘치게 감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문제가 되며 신자를 위협하는 것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구절에 우리는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을 보게되며 왜 뿌리 박고 세움을 받고 교훈을 받아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하여 골로새서 28절을 보면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합니다. 주의하라는 조심하라는 뜻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지각을 통하여 인지하고 깨달으며 알아채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사람이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로 나를 사로잡으려고 할 때에 그것을 인지하여 알아 차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철학이 너를 사로 잡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에 대하여 철학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학문으로 연구하는 철학 전체를 부정하거나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 들어와 신앙으로 그리고 믿음과 연합하여 변질시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럼 바울이 어떤 의미로 철학을 이야기하며, 헛된 속임이라고 말한 것의 의미의 당시에 의도된 것들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일차적으로 바울의 의도는 유대 기독교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유대적 신앙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로들의 유전이 교회 안에 들어와 그리스도인들을 혼란하게 하였습니다. 무엇이 유대교의 전통으로 버려야 할 것들인지 무엇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필요 없는 헛된 것인지 혼란스러웠던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들의 삶의 배경에는 종교적 의식과 예식이 있었습니다. 절기라든지 또는 먹고 마시는 문제든지 이러한 것들 것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배경 즉 세상의 초등학문이었기에 그것에 익숙한 삶을 살았던 이들에게 있어서 여전히 그들이 그리스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고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대인의 전통과도 상관 없는 삶의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유대 장로들의 유전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깨어서 인지하며 알아차려서 사로잡히지 말라는 경고가 불필요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유대 배경 속에서 주어진 것이지만 문제는 철학과 속임수는 내용이 다를 뿐 지금도 여전히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전통을 교회로 가져오며, 세상의 초등 학문을 교회에서 가르치며 믿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사람의 전통과 세상 초등 학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세상 초등학문을 다른 표현으로 쉽게 설명하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사상이나 생각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인류 보편적 가치로 여겨지는 것들이 있는데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배려하며, 존중하며,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믿고 확신하는 보편가치 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의 철학을 통하여 얻어지고 가지게 된 것입니다.

철학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사실 철학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철학하다 라는 뜻을 보면 자기 자신의 경험 등에서 얻어진 세계관이나 인생관의 궁극적인 근본 원리를 추구하고 탐구하다 세계관 인생관의 근본 원리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하는 것은 이미 철학을 하는 것이며, 그 철학을 바탕으로 인류 보편 가치로 사랑해야 한다 라는 것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진리를 변질 시키는가 하면 성경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짐승과 비교된 인간의 존엄성이나 또는 생명의 존엄성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철학이 추구하는 참된 인간 됨이 바로 서로 사랑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과 기원이시며,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서 그 사랑을 받음으로 사랑할 수가 있게 됨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해야 하며, 아끼며,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사랑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도덕적 인간, 윤리적 인간, 참된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변질 시켜서 사랑을 인류 보편적 가치와 하나님의 뜻이 같은 의미로 이해되게 함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세상의 초등학문에 따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며,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둘째는 사랑에 대하여 더 나아가 더해지는 것으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전제로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상 철학은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고 합니다. 사랑은 훈련은 통하여 증가 되는데 자신을 사랑하는 훈련을 하지 않은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철학은 교회 안에서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으로 바꾸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이익을 추구하고, 성공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변질 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씀을 이렇게 변질시키는데 사랑이란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내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그분의 내가 잘되기를 바라고, 내가 건강하고, 성공하고, 번창하고, 부유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께 기도함으로 또한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함으로 그분의 사랑이 내게 부어져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할 수 있다는 이단으로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개념은 행복이 맞지만 이 행복은 결코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소유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행복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소유함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그분이 내 안에 충만할 때에 얻게 되는 감정입니다. 성경은 한번도 물질이나 세상에 있는 것이나 세상적인 것을 신자에게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 철학은 속임수로 신자의 행복을 이 땅의 것으로 바꾸고, 물질로 변질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성공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의심하게 하며, 물질이 부족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을 떠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셋째로는 크고 화려한 것은 좋은 것이며, 옳은 것이다 라는 개념을 세상 철학은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크고 영광스러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계시는 교회도 크고 영광스럽게 치장하며, 꾸며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다는 개념은 세상적으로는 좋은 것이며, 옳은 것입니다. 사람이 많은 것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옳다고 하는 것은 세상 철학입니다. 세상이 민주주의라는 정치 제도를 주장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크거나 많다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법에 맞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분의 성품에 적합한 것이 옳다고 합니다. 또한 큰 것보다는 거룩한 것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이러한 사상과 철학들이 들어와 우리 자신을 변질시키고 그렇게 함으로 사로잡는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로잡다는 단어는 전쟁에서 패배함으로 노략질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하는 행동이 성경적이며, 말씀에 기록된 원리대로 사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전통이나, 세상의 원리를 따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인지하고, 알아 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노략물이 되어 끌려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포로가 된지도 모른 채 교회에 다니며, 그곳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일한 것이며, 자신의 영혼에 대하여 무책임하게 방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하기에 주의하여야 합니다. 무엇을 믿을지를 주의하고, 어떻게 살지를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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