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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2026.04.13 15:56

부자 청년의 문제

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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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https://youtube.com/live/eU-HE-mRw-k

 

오늘 본문에는 모든 것을 갖춘 한 청년 관리가 등장합니다. 그는 권력도, 재물도, 도덕적 열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더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그는 답을 찾기 위해 '선한 선생님' 예수께 달려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 나아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가를 묻는 부자 청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누가복음 1818절을 보면 [ 18: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A certain ruler asked him, "Good teacher,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관원이었던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묻습니다. 이 질문이 어떤 의미를 담아 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 속에는 질문자의 마음이 담아 있고, 의도와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을 하여야 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하여야 라는 동사는 행하다 라는 뜻으로 부정과거 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에서 부정과거(Aorist) '단회적 사건'이나 '특정한 행동의 완료'를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그 의미는 이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해 "단 한 번의 결정적이고 위대한 선행" 혹은 "완벽한 목록의 완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내가 아직 하지 않은 어떤 특별한 과업이 무엇입니까? 그것만 알려주시면 당장 해치우겠습니다"라는 식의 접근인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은 영생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나 은혜의 선물이 아니라, 노동에 따른 대가로 이해한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의 에너지를 투입하면, 영생이라는 결과물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계산적 사고입니다. 또한 이 질문에서 내가 무엇을 이라는 표현 속에서는 질문의 주어는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있습니다.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 '결단'에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적 구원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 부자 청년은 누가복음 1821절을 보면 [ 18: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All these I have kept since I was a boy," he said. 그는 이미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지켜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찾아와 "무엇을 하여야" 하느냐고 묻는 것은, 자신의 행위로도 채워지지 않는 영적 불안감이 있었음을 역설합니다. 그는 재물을 소유하듯 '영생'도 자신의 소유 리스트에 추가하고 싶어 했습니다. "영생을 얻으리이까"에서 '얻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상속받다', '차지하다'라는 뜻으로, 영생을 일종의 영적 자산으로 취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 청년의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22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8:22절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When Jesus heard this, he said to him, "You still lack one thing. Sell everything you have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Then come, follow me."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족하다는 단어는 결핍되다 라는 뜻으로 이 단어는 단순히 수량이 모자라다는 뜻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핵심 요소가 빠져 있다"는 뜻입니다. 부자 청년은 수많은 율법을 행위로 '채웠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그 중심에 가장 중요한 '하나님 사랑'이라는 엔진이 빠져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부자 청년에게 세 가지 동사를 사용하여 그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십니다. 팔고, 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먼저 팔다 라는 단어는 한 번에 즉각적으로 결단하여 처분하라는 명령입니다. 나누어 주다 라는 동사는 역시 미루지 말고 즉시 시행하라는 긴박성을 담고 있습니다. 앞의 '팔고 나누어 주는 것'은 단회적 결단인 반면, 주님을 따르는 것은 시제가 현재형으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 소유를 버리는 것은 주님을 영원히 따르기 위한 입구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너무하다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병해 본문은 마가복음 1021을 보면 [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Jesus looked at him and loved him. "One thing you lack," he said. "Go, sell everything you have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Then come, follow me." 여기서도 동일하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라는 단어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들으시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내용은 좀더 세밀한 대화의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그를 보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을 보신 것입니다. 이 단어는 안을 들여다보다 주목하여 보다 라는 뜻으로 단순한 시선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과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시선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내면을 보신 것입니다. 그의 속을 들여다 보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에 사랑하다 라고 사용된 단어는 아가페 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의 행복을 간절히 바라시며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 청년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만하며 대답할 때, 그를 한심하게 보시거나 비웃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영혼의 갈급함과 그가 갇혀 있는 한계를 보시고 측은히 여기는 신적인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그가 행복하며 잘되기를 간절히 원하신 것입니다.

        이로 보건데 주님께서 그에게 "네 소유를 다 팔라"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명령은 그를 골탕 먹이거나 시험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신 '해방의 초대'였다는 사실을 이 단어가 증명합니다. "네 소유를 다 팔라." 이 말씀은 단순히 무소유를 주장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청년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보다 더 높이 앉아 있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들춰내신 것입니다. 그에게 재물은 단순한 자산이 아니라 그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소유'한 줄 알았으나, 사실은 재산이 그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급소를 찌르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재물'이 사실은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우상'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소유를 팔라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닌 걸림돌의 제거를 위함입니다. 재산을 파는 행위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다만,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결정적인 장애물을 제거하라는 부르심 입니다. 주님은 청년에게 재산을 버리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재물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얻으라고 초청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초청에 대하여 부자 청년의 대답이 다음 절에 나오는데 누가복음 1823절을 보면 [ 18: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When he heard this, he became very sad, because he was very wealthy. KJV과 표준 새번역에서는 근심에 사로잡힌 또는 큰 슬픔에 빠진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청년이 23절에서 심히 근심하였고 24절에서는 그는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나 더욱 근심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면 모두가 슬픔과 절망이 떠나가고 기쁨과 즐거움이 회복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절망 속에서 그들은 소망을 얻었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오며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습니다. 이 부자 청년처럼 예수님을 만나 오히려 그는 큰 슬픔에 빠졌고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조금 걱정하는 수준이 아니라, 슬픔이 사람을 완전히 에워싸서 빠져나갈 틈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deeply grieved' 또는 'exceedingly sorrowful'로 번역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히 근심하였다는 표현은 죽음의 원인이 될 정도의 슬픔입니다. 즉 너무나 죽게 될 정도의 슬픔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히 근심하다 라는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매우 드물게 사용되며,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마가복음 1434절에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περίλυπος)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된 단어와 같습니다. , 이 부자 관리가 느낀 감정은 단순한 고민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도 같았던 재물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겪는 존재론적 비탄에 가깝습니다. 또한 하더라 라는 동사 형태(γενήθη)는 문법적으로 과거 수동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스스로 근심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는 말씀이 그의 심령에 부딪혔을 때, 슬픔이라는 감정이 그를 압도하여 '그렇게 되어버린(became)' 상태를 강조합니다. 누가복음은 이 근심의 이유를 바로 뒤이어 설명합니다. "그가 큰 부자이므로". 헬라어 문맥상 그의 '소유'가 그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소유가 그를 옭아매어 슬픔의 감옥에 가두어 버렸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무슨 말씀이 이 청년을 죽음의 슬픔에 빠지게 만들었습니까?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쫓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 청년에게 죽을 정도의 슬픔이 된 것입니다. 이 청년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마치 자신을 죽이려는 말씀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돈은 그의 전부였으며, 그를 지탱하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를 행복하게 하며, 기쁘게 하는 전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죽을 만큼 힘든 것입니다. 이 청년의 마음이 죽게 될 정도의 고민에 빠진 것이 주님이 이 청년을 의도적으로 죽게 하기 위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이 청년 안에 든 주님의 말씀을 죽기까지 대적하며 거부하는 세력이 그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의 심히 큰 슬픔과 근심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바뀌고 싶지 않으며 순종하고 싶지 않은 내면의 세력이 주님의 말씀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너무나 평안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의 말씀이 자신의 내면의 세력과 충돌하기 시작하자 그는 심히 큰 근심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까? 그는 자신의 소유를 지키기를 원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그것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으며 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에게 있어서 자신의 소유는 영생보다 더욱 귀한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 보다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청년은 심히 근심하며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청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돌아갔다는 말을 통하여 그것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가 돌아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우리 인생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인이 되는 삶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물질에 지배를 받지 말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610절을 보면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For the love of money is a root of all kinds of evil. Some people, eager for money, have wandered from the faith and pierced themselves with many griefs. 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6 10절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돈을 향한 인간의 태도가 어떻게 영적인 파멸을 불러오는지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랑하다 라는 단어는 필로스 라는 단어와 은 즉 돈을 의미하는 단어의 합성어로 단순히 돈을 사용하는 상태가 아니라, 돈을 친구처럼 혹은 신처럼 친밀하게 사랑하고 갈망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돈 자체를 악이라고 하지 않고, 돈을 향한 탐욕적 애정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열매와 가지의 근원이 됩니다. ,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동기가 되어 세상의 온갖 추악한 범죄와 영적 타락이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미혹을 받아 라는 단어의 의미는 길을 잃게 하다 라는 뜻으로 수동형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는 스스로 길을 벗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영적으로는 돈이라는 힘에 의해 '길 밖으로 내던져짐을 당하는' 수동적 파멸의 상태에 놓이게 됨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돈을 영적 단순한 물질이 아닌 영적 세력으로 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24절에서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돈에 대하여 우리는 청지기의 사고를 가지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것을 관리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관리와 책임감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돈은 최선의 종이 될 수 있지만, 최악의 주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하는 순간, 돈은 우리 영혼을 에워싸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가로는 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를 찔렀다고 합니다. 찌르다 라는 단어는 꿰뚫다, 관통하다라는 뜻으로 단순히 바늘에 찔리는 정도가 아니라, 고기를 꼬챙이에 끼우듯이 완전히 관통하여 꿰뚫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방에서 겹겹이 꿰뚫어 몸 전체가 고통의 창에 박힌 상태를 묘사합니다. 마치 짐승을 통째로 꼬챙이에 끼워 불에 굽는 듯한 처절한 고통을 형상화한 단어입니다. 누가 그렇게 합니까? 자기가 자기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고통의 가해자가 외부의 적이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 비극의 핵심입니다. 돈을 사랑하여 쫓아갔던 자신의 선택이 결국 자기 자신을 찌르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의 초청을 거부하고 돌아간 부자 청년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의 마음을 살펴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과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오직 그분으로 만족하기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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