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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aN8d3lAPkMQ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인간 개인의 고유한 기질과 신앙과의 연관 관계에 대하여 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간의 신앙의 수준의 차이가 나는 일들이 자주 목격되고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또는 신앙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지 않거나, 신앙에 대하여 잘 모르는 이들의 경우에는 교회에 다니면 모두다 그리스도인이고 또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다 보면 어떤 이들은 참 신자 다운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나 행동 그리고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고,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성경에 대하여도 잘 모르며, 보기에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 않고, 그냥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1절과 3절을 보면 [고전 3:1,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 그들이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과 같다고 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할 때에 이들이 구원 받지 않았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바울은 이들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즉 중생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육신에 속한 자로서의 삶을 모습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자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와 같다고 합니다. 이런 미성숙한 신앙과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원인으로 인하여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첫째로는 이러한 다름은 교회에 다닌 연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다고 해서 저절로 예수를 믿는다면 저 사람처럼 믿어야 되 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지 않아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자 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그의 인격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절제와 선함과 신실함이 성품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러한 구분과 다름이 존재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믿되 신실하게, 누가 보기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해야 되는 것은 이 다름과 차이의 근원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모두가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출발점이 다르거나, 또는 시작부터 무엇인가 다르게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첫출발은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우리 주님의 은혜의 구원 즉 중생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중생의 과정을 통과합니다. 이유는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 즉 거듭남이라고 표현되는 것은 사람이 다시 태어난 다고 해서 중생 또는 거듭남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난 다는 것은 영적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며, 영적으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생 이전에 인간은 어떤 상태인가 하면 육신으로는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절을 보면 [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As for you, you were dead in your transgressions and sins,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셨다고 할 때에 살리셨다는 것은 죽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상태였는데 바로 허물과 죄로 인하여 우리가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를 살리셨는가 하면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를 살리셔서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났다는 사실은 이제 우리에게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지 않았는가 하면 영이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도 보이지 않았으며,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게 되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저절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분으로 그분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생은 모두에게나 동일한 경험일 뿐만 아니라 동일한 방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를 중생하게 하신 것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로마서 1011-12절을 보면 [ 10:11-12]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As Scripture says, "An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never be put to shame." For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Jew and Gentile-the same Lord is Lord of all and richly blesses all who call on him,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주로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저를 믿는 자는 결코 거절함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결코 거부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면 정말로 거절당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은 신뢰할만 한가 혹시 행여나 우리가 버림을 당하거나 거부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대하여 결코 그러한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누구에게 그렇습니까?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차별이 없이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부요하시다는 것은 그분은 자신에게 오는 자들을 차별 없이 모두다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크기와 신앙적 삶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중생의 다름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큰 자와 믿음이 적은 자,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경건한 자와 그렇지 않은 불경건하며,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이 모두다 같은 중생을 체험하며, 같은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그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차이와 구별되는 것이 있음은 중생 이후의 그들 사이의 다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과 신앙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하는 성경 말씀이 있는데 사도행전 1711절 말씀을 보면 [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Now the Berean Jews were of more noble character than those in Thessalonica, for they received the message with great eagerness and examined the Scriptures every day to see if what Paul said was true.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비교가 되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베뢰아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이들과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는 이들입니다. 정확하게는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는 유대인과 베뢰아에 살고 있는 유대인입니다. 왜냐하면 앞절에서 바울이 베뢰아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베뢰아 유대인들 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둘의 차이점으로 부각되는 것이 더 너그러워서 라는 말씀입니다. 한글 성경에서 더 너그러워서 라는 번역은 예전 개역한글 성경보다는 낫습니다. 예전 번역본은 더 신사적이어서 라고 번역하였는데 신사적이라는 말의 현대적 의미는 어떤이에게는 단순히 남성이 정장을 입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좀더 깊이 생각하면 품위와 배려를 갖춘 인격적인 태도로 읽힙니다. 교양과 품위를 갖춘 남자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말과 행동이 점잖고 품위 있으며 자신이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것 등이 신사적이다 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이 이 단어를 담아내고자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개혁 개정의 너그럽다 라는 단어도 양보심이 있고, 다른 이에 대하여 수용적이며, 포용력이 있다는 의미로 읽혀지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더 너그럽다 라는 말 다음에 나오는 그 이유에 대하여 왜냐하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며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너그럽다는 말의 의미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상태이며,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는 그들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출신이 고귀한, 족보가 좋은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사적이다, 너그럽다 라고 번역하고 영어 성경에서는 고귀한 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출생이나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 앞에서 편견과 시기심을 버리고, 진지하고 태도가 올발랐음을 뜻하는 영적 고상함을 비유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이 어떻게 더 너그러운 지에 대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라고 이들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자원함, 열정, 미리 준비된 마음을 뜻합니다. 여기에 모든을 뜻하는 단어가 붙어 적극적이고 전폭적인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바울의 말을 억지로 마지못해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무엇을 말씀 하실지 기대하며 스펀지처럼 흡수하려는 영적 갈급함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상고하다 라는 단어를 보면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합니다. 이 단어의 뜻은 법정에서 정밀하게 신문하다,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검증하다 라는 사법적 용어입니다. 그리고 문법적으로 이 단어는 현재 분사형으로, 날마다 지속해서, 끊임없이 조사했다는 말로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행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조사하고 검증하는 일들을 날마다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더욱 바르게 믿고, 온전히 믿고, 완전한 신뢰와 확신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신앙의 년수가 여러분의 신앙을 자라게 하지 않습니다. 오랜 동안 신앙 생활을 해도 어린 아이와 같아 믿음이 흔들리고, 신앙 생활에 염증을 느끼기도 하고, 의무 감으로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거친 파도 위의 조각배처럼 믿음과 신앙이 위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이러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까? 첫번째는 이들의 기질적 성향이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너그럽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고유한 기질이 신앙에 영향을 미치는가? 에 대하여 그렇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 그의 치밀하고 세밀한 기질은 스테반의 죽음에 대하여 당연히 여길 뿐만 아니라 그의 열심은 다메섹에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가두려 했습니다. 그의 기질적 특성은 그의 회심이 후에 바로 나타나는데 담대하게 자신의 부인했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기질적 특성으로 로마서나 히브리서와 같은 기독교 교리를 온전히 가르치는데 탁월하게 사용된 것입니다.

둘째로는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본성적 기질을 뛰어넘어 새로운 기질을 만드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에스겔서 3626-27절을 보면 [ 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I will give you a new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you; I will remove from you your heart of stone and give you a heart of flesh. And I will put my Spirit in you and move you to follow my decrees and be careful to keep my laws.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그리스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주어질 것이 새 영을 너희 속에 둘 것이며 새 마음을 너희에게 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27절에서 내 영을 너희 속에 둔다고 합니다. 여기서 영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즉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베뢰아 유대인들의 마음에 주신 것입니다.

개인의 기질적 성향이 신앙과 믿음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지도 않고 무엇인가에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집중하거나, 연구하거나 찾아 보거나 하는 그런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개인의 기질적 성향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불신앙과 비신앙적인 것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자신의 기질적 특성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며 더욱 불신을 조장하는 일에 앞장서는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중생을 하였다는 것은 여러분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나의 개인적 기질을 변화시키며, 그것을 옳게 활용하도록 도우십니다. 베뢰아 유대인과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모두 같은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는 베뢰아 유대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고 신앙과 믿음에 있어서 큰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815절을 보면 [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But the seed on good soil stands for those with a noble and good heart, who hear the word, retain it, and by persevering produce a crop. 씨가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착하고 좋은 마음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착하고 좋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고자 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듣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 앞에 전적으로 굴복하여 스펀지처럼 말씀을 흡수하는 자입니다.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순종하겠다는 자세가 바로 말씀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것을 지키어 라는 단어는 꼭 붙잡다, 소유하다, 간직하다 라는 뜻입니다. 살다 보면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방해하는 세상의 유혹과 박해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착하고 좋은 마음은 내게 손해가 오고 어려움이 찾아와도 내 생명이 이 말씀에 걸려 있다는 심정으로 말씀을 마음의 중심에서 빼앗기지 않고 굳게 지켜냅니다. 그리고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라고 합니다. 신앙의 성숙과 열매는 하루아침에 뚝딱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썩고, 비바람을 맞고, 추위와 더위를 견뎌야 30, 60, 100배의 결실을 보는 것처럼, 착하고 좋은 마음의 핵심은 인내 즉 말씀 아래에서 묵묵히 견뎌냄에 있습니다. 내 기분과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며 묵묵히 영적인 자리를 지켜낼 때 결국 삶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신앙의 차이는 어떠한 태도와 마음으로 사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왜 내 신앙은 항상 어린 아이와 같을까? 왜 나는 자라지 않고 신앙의 년수만 길어지고 여전히 똑같을까? 이런 고민이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바꾸셔야 합니다. 이 마음의 변화는 나의 결심에 온전히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내어 놓고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마음을 인도하시는 분에 달린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어리석은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이 구함이 바로 여러분의 변화의 첫 시작입니다. 구한다는 것은 간절히 원하다는 것이며, 경건함과 거룩함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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