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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2025.08.12 12:15

과부의 헌금

YC
조회 수 13722 추천 수 0 댓글 0

주일 말씀 영상https://youtube.com/live/zwQs_oc8O1M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과부의 헌금으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본문을 읽으시면서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들이 떠올랐는지 궁금합니다. 원래 본문을 읽으면 대충 오늘 주제가 무엇이고 어떤 말씀을 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별로 듣고 싶지 않거나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마음이 들면 조용히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귀로는 듣는 것 같지만 마음은 다른 곳으로 떠나 말씀이 심령에 들려오지 않는 상태가 되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본문에 대한 이해와 다를 수 있기에 좀더 주의 하여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헌금이 주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과부가 드린 연보(남에게 주어서 보탬이나 도움이 됨) 즉 헌금이 다른 부자들이 들인 헌금 보다 주님이 보시기에 더욱 값진 것이라는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과부가 드린 헌금이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은 그는 구차한 중에 자기 모든 소유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민하게 되고 마음에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말씀대로 그리고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분들에게 고민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살고 싶지만 이런 부분에서 넘지 못할 벽을 만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구차한 중에 자기 모든 소유를 드렸던 과부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현실에서 우리는 그렇게 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믿음이 없는 자신을 탓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나는 과부같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드리지 못하는 것일까? 답답한 마음이 가득하며 자신의 신앙과 믿음에 대하여 절망만을 느끼게 됩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들과 함께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이 말씀으로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스스로 믿음이 없고 신앙이 없다고 낙심하지 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고 신자로써 책임과 의무가 없는 값싼 은혜를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오늘 이 본문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을 바르게 알고 깨닫자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전부를 바치는 것을 원하는가? 구차한 중에서라도 즉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는데도 하나님께 무조건 바쳐야 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본문이 왜 교회 건축할 때 선포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도 답을 해야 합니다. 교회에 헌금하라고 독촉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 있는 말씀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모든 소유를 바칠 때에만 하나님께서 그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는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1241절을 보면 [ 12: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Jesus sat down opposite the place where the offerings were put and watched the crowd putting their money into the temple treasury. Many rich people threw in large amounts. 예수님께서 연보궤의 반대편에 앉으셨습니다. 거기에 앉으신 이유는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시기 위해서 입니다. 보실새라는 말은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들이 헌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헌금함은 성전의 여인의 뜰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헌금함은 모두 열세 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헌금함은 놋쇠로 되어 있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헌금함이 놋쇠로 된 이유가 당시의 헌금이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구리등의 금속이었기에 소리를 내게 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함으로 드리는 자들이 더 많이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또한 이 헌금함은 그 형상이 나팔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헌금함중 9개는 성전세나 제물을 대신한 헌금을 바치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나머지 4개는 가난한 자를 돕는데 쓰일 재원마련을 위해 설치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고 계실 때에 부자들이 와서 헌금을 합니다. 본문에서 넣는데 라는 말은 계속 던진다는 의미입니다. 즉 나팔처럼 생긴 헌금함에 금속 동전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소리가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들의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을 때 마가복음 1242절을 보면 [ 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But a poor widow came and put in two very small copper coins, worth only a few cents. 예수님께서는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렙돈은 당시의 화폐가치로 따져서 참새 반마리를 살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돈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최소 단위가 렙돈이고 과부는 그 최소 단위의 돈인 두 렙돈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제 마가복음 1243절과 44절을 보겠습니다. [ 12:43-44]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Calling his disciples to him, Jesus said, "Truly I tell you, this poor widow has put more into the treasury than all the others. They all gave out of their wealth; but she, out of her poverty, put in everything-all she had to live on." 과부의 헌금을 보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에 헌금을 한 모든 사람들 보다 많이 넣었다고 합니다. 44절에 원문에는 왜냐하면 이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풍족한 중에 넣었고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랍니다. 구차한 이란 궁핍한 중에서 라는 말로 이 과부가 얼마나 가난한 상태인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생활비 전부 라는 말은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 이라는 뜻으로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생계를 위해서는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부자와 과부의 헌금을 비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풍족한 가운데 일부를 드렸고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 전부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부자들이 일부를 드린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본문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풍족한 가운데 일부를 드린 것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예수님은 과부가 궁핍한 가운데 드린 것이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드린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일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원하신다는 말은 그 설득력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헌금의 자세를 교훈하신 것인가? 하는 부분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43절과 44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서 하신 말씀입니다. 과부가 더 많이 헌금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궁핍한 가운데서도 그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헌금에 대한 교훈이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이 과부와 같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바치라는 의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고 있어서 바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28절을 봅시다. [ 10: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Then Peter spoke up, "We have left everything to follow you!"이 구절은 재물이 있는 자는 천국에 가기가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고백하는 부분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모든 것을 바친 자들입니다. 그런데 과부의 헌금을 통하여 다시 전부를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너희도 이렇게 과부처럼 전부를 받치라 이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까?

        과부의 두렙돈 이라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좀더 우리의 시각을 넓혀야 합니다. 이 이야기가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헌금에 대한 이야기는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실 때에 헌금의 사건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11장부터 다른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헌금 사건 바로 앞의 사건은 헌금 사건의 이야기를 해결할 중요한 힌트를 제공합니다. 마가복음 1238절부터 40절까지를 봅시다. [ 12:38-40]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 As he taught, Jesus said, "Watch out for the teachers of the law. They like to walk around in flowing robes and be greeted with respect in the marketplaces, and have the most important seats in the synagogues and the places of honor at banquets. 니라 They devour widows' houses and for a show make lengthy prayers. These men will be punished most severely."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심을 봅니다.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면 서기관들에 대하여 삼가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삼가라는 말은 주의 하라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그들의 무엇을 조심하는가 하면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하여 입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입니다여기서 긴 옷이란 발목까지 오는 숄로 권위를 드러내는 옷을 의미합니다. 또한 복잡한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그리고 회당의 상좌에 앉아 자신의 지식과 학식을 자랑하는 것, 잔치의 상석에 앉아 사람들 앞에 높아지는 것들을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40절에는 서기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외식 즉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길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도적들이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과부의 가산이라는 것은 재산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법률적 자문을 해주며 돈을 뜯기도 하고 과부의 재산을 관리해 주며 돈을 빼앗으며 과도한 헌금을 강요함으로 재산을 빼앗기도 하였습니다. 즉 종교를 이용하여 이들은 과부들의 남겨진 재산을 모두 훔쳐내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이 받을 심판은 더욱 엄할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과부들은 더욱 가난해져서 고난 속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며 실천해야 할 서기관들은 사회의 약자인 과부들의 재산을 탈취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며 과부들을 돌보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가장 약자이며 자신의 생계 조차도 이어갈 수 없는 가난한 과부는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립니다. 이 둘의 비교를 통하여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죄를 물으며 그들의 악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43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과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서기관들을 조심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악에 대하여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과부의 헌금은 이것이 자의든 타의든 종교적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사회에서 보호받으며 생계를 위해 도움을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 1절부터 4절은 오늘 본문과 병행 구절입니다. 누가복음 21 5절 이하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내용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215절과 6절을 보면 [ 21:5-6]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Some of his disciples were remarking about how the temple was adorned with beautiful stones and with gifts dedicated to God. But Jesus said, "As for what you see here, the time will come when not one stone will be left on another; every one of them will be thrown down."어떤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은 마가복음 13:1절에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가 성전을 가리키며 자랑합니다. 성전이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진다고 합니다.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자가 성전에 대하여 찬양할 때 한 말이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이고 합니다. 헌물이라는 말은 헌금입니다. 마가복음에는 헌물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성전은 백성들의 헌금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 헌금은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의 탐욕과 욕망으로 강요된 헌금이었습니다. 마치 과부가 두 렙돈의 헌금을 바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과부의 헌금 사건은 조심해야 할 타락한 종교 지도자인 서기관들에 대한 심판에 대하여 가르침으로 그들의 희생양이 된 과부의 헌금과 그 헌금으로 세워진 성전의 파괴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과부의 헌금이 헌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악행과 죄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이며 그 가운데 당시의 사회의 약자인 과부의 보호받지 못함과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함과 종교적 착취에 이용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은 헌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바르게 서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헌금의 문제로 교회가 시끄러운지 모릅니다. 누가 더 큰 예배당을 짓는가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척도로 변질되었습니다. 2008년 경제 대 공황이 왔을 때 캘리포니아에 수 많은 교회들이 교회 건축 문제로 파산했습니다. 교회가 사회의 약자들은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더 크고 더 높은 곳을 향하려 하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교회여야 합니까? 우리 주변의 약한 형제를 신앙이라는 이유로 억압하지 말고 돕고 사랑해야 할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서기관들처럼 신앙이라는 짐으로 형제를 고통스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연약한 형제를 위로해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한다 하지 말고 행함으로 사랑을 증명해야 합니다. 궁핍한 자들을 도우십시오. 내가 교회에 헌금 했으니 교회가 알아서 해야지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교회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인 자신은 하지 않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돌보아야 합니다.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한 이야기의 핵심은 당시의 탐욕에 눈먼 서기관과 사회의 약자를 돌보지 않고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기에 급급한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질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는 그런 종교적인 타락과 문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그냥 두셨다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타락했으니 네가 해야 할 종교적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과부의 헌금에 대하여 그녀는 전부를 드렸다고 말씀하심으로 그녀의 수고와 애씀에 대하여 인정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타락을 도처에서 봅니다. 세상 신문에 부끄러울 정도로 매일 교회가 욕을 먹고 종교 지도자들이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며 실망하며 비난합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신자들이 오히려 이러한 일을 비난하며 욕을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은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해야 할 신앙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실망감과 절망감이 들을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이 해야 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자의 삶을 등한시하며 책임과 의무와 삶을 포기하는 것은 신앙적 게으름과 나태함을 가리기 위한 핑계일 뿐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과부에게 종교 지도자들이 타락했으니 네가 해야 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접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네가 해야 할 타인을 섬기는 일을 그만 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잘못된 행위를 이유로 자신이 해야 할 신앙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들은 자신의 내면의 탐욕을 이루기 위하여 이러한 것을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세속주의에 물든 교회를 바라보면 비난하며 그것을 핑계로 책임과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그러한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인하여 바른 신앙이 나타나도록 애를 써야 하는 것이 참된 신자의 자세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썩지 않았던 시대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는 그런 시대에도 자신의 신앙적 책임과 의무를 그 어두움 가운데 빛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빛임을 잊지 마십시오. 빛이 필요한 것은 어두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 세상은 항상 어두운 가운데 있었습니다. 지금의 시대만이 어두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시대를 한탄하며 핑계와 무관심으로 여러분의 신앙적 삶을 바꾸지 마시고 이 땅에 빛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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