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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2025.09.09 18:11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은 존재하는가

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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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e_0vfPjl2Ks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보호 본능을 가지고 있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는 위험한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안전한 길을 두고 벼랑 끝에서 걸어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벼랑 끝에서 걸어가는 것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입니다. 비록 잠시 스릴을 느낄 수 있지만 언제가 반드시 그 결과가 따르기 때문에 벼랑 끝에서 멀어져야 하며 안전한 길 위에서 걸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먼저 말씀 드리는 이유는 신앙도 안전한 길이 있고, 벼랑 끝에 서서 걷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안전한 길이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대로 또한 가르치는 대로 믿고 따라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벼랑 끝에 서서 걷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대로가 아니라 자신이 아는 대로 그리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사는 삶입니다. 이 삶은 보장이 없으며, 실족할 수 있는 삶인 것은 후에야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벼랑 끝에 사는 삶으로 비유하고자 하는 것은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하여 입니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란 표현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미국 성경 학자 스코필드가 지은 스코필드 관주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그리고 많은 목회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하게 합니다. 첫번째 분류는 거듭나지 않고 믿지 않는 불신자들입니다. 둘째는 중생을 통하여 거듭난 영적인 사람으로 성령이 충만하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 가운데서 성령 안에 사는 자입니다. 셋째로는 중생은 하였으나 육신을 따라 걷기에 그리스도 안의 어린 아이로 머물러 있는 자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자들입니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요,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된 자이긴 하지만 여전히 육체를 따라 걷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어디를 통하여 확산되고 널리 퍼지게 되었는가 하면 CCC라고 불리우는 초교파적인 기독교 학생 운동 단체에 의해서 입니다. 대학생 선교회에 의해서 출판된 평신도 피교육자를 위한 교재를 보면 세 가지로 사람을 분류하는데 첫번째의 도형 속에서는 자연인을 나타내며, 자연인의 왕자에 자신이 앉아 있으며, 삶의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자신이 해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둘째의 도형 속에서 보여지는 것은 세속적인 사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첫번째 사람의 경우와 두번째 사람의 경우에 차이점이 있다면 두번째 사람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원 밖에 있고 원 안에 있다는 차이입니다. 이 도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속적인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으나 그들의 삶은 돌이킴 이전에 행하던 것과 똑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도형의 경우에는 그리스도가 왕좌에 앉아 있으며, 주인으로 다스리고 있는 모습인 영적인 사람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정말 성경이 이렇게 사람을 구분하고 있으며,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성경적인가 그렇지 않은 가를 생각해 보기 전에 사람들은 이미 이러한 가르침에 익숙한 이유가 있는데 교회 안에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비록 삶이 세속적이지만 그래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니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사들도 따지고 하면 귀찮고 또 성도들이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 여러분들은 자꾸만 벼랑 끝으로 이끌며, 그쪽으로 자꾸만 떠 민다면 그러한 사람을 재미로 하는 것이니, 딱히 악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 그냥 두시겠습니까? 장난으로라도 벼랑 쪽으로 미는 시늉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마치 눈을 가리게 하고 다른 사람의 이끌림에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눈을 뜨거나 또는 몸이 미끄러지는 것 같아 안대를 푸니 자신이 벼랑 끝에 서 있으며,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세속적인 그리스도인 정말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라면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았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러한 가르침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면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그는 벼랑 끝을 걸어가는 중인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실족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사활이 걸린 문제인 것입니다.

   그럼 첫째로 성경이 사람을 구분할 때에 자연인 즉 중생하지 않은 불신자와 중생은 하였으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과 그리고 중생하여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영적인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 복음 3 36절을 보면 [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Whoever believes in the Son has eternal life, but whoever rejects the Son will not see life, for God's wrath remains on them.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말씀은 아들을 믿는 자는 어떠한 자인가 하는 것인데 아들을 믿는 다는 것은 아들에게 순종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믿는 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순종하지 않는 아들을 믿는 자는 없습니다. 즉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없으며 오직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순종하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만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에 로마서 85절을 보면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데 [ 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Those who live according to the flesh have their minds set on what the flesh desires; but those who live in accordance with the Spirit have their minds set on what the Spirit desires.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합니다.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하다는 말은 그것에 지배를 받으며, 매 순간 그것에 이끌린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을 따르는자 즉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일을 늘상 이끌림을 받으며,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간의 회색지대에 속한 사람은 없습니다.

   둘째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 있을 수 있다는 가르침의 위험성은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지 않고도 그분을 구세주로 영접할 수 있다고 하는 잘못된 허용을 조장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는데 성경 어디에서도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5절을 보면 [고후 4: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For what we preach is not ourselves, but Jesus Christ as Lord, and ourselves as your servants for Jesus' sake.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고 합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즉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와 구세주를 구분하여 믿으며,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골로새서 26절을 보면 [ 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So then, just as you received Christ Jesus as Lord, continue to live your lives in him,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고 합니다. 이 말이 골로새 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모든 중생한 자들은 중생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생이 아닌 것이며,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고 여기며, 왜 그러한 것을 용인하며 그렇게 받아 들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은 받고 싶지 않으나 여전히 육체를 따라, 죄의 성품을 따라 살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어지고자 함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은 바꾸고 싶지 않고, 하나님은 계신 것 같고, 종교심이나 막연한 두려움이나 인생의 문제를 초월자에게 의탁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결코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신자들이 육체로 인해 여전히 유혹을 받으며, 때때로 육체에 굴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육신에 혹은 육체를 따라 걷고 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되어질 수 있다는 가르침은 결코 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다고 우기는 이들이 근거로 삼는 고린도전서 31-3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을 보면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Brothers and sisters, I could not address you as people who live by the Spirit but as people who are still worldly-mere infants in Christ. 여기서 분명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육신에 속한 자 라고 부르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육신에 속한 자라고 부를 때에 그들을 실제적으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부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제 삼의 사람이 존재함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전혀 신령한 자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분명 바울이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너희가 신령하지 않아 즉 영적이지 않아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영적인 자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말할 수가 없으며 현재도 그러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영적이 자들의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형제들아 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한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들은 불신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어린 아이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라고 해서 인간이 아닌 짐승인 것은 아닙니다. 말을 못하고, 분간을 못해서 아무거나 집어 먹고 한다고 해서 짐승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인간이지만 아직 미성숙한 것입니다. 즉 이들은 영적인 자들이지만 그들의 신앙 수준이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하면 3절을 보면 [고전 3: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You are still worldly. For since there is jealousy and quarreling among you, are you not worldly? Are you not acting like mere humans?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라고 합니다. 즉 그들이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미 성숙하여 서로 시기하며 분쟁을 하여 당파를 짓고 편을 나누는 일들을 행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육신에 속한 자들이 행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들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성숙에 대한 책망은 그들이 구원받은 신자들이기 때문에 요구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으로 성장을 해서 이러한 미 성숙의 상태를 벗어나야 했던 것입니다. 신자라고 해서 모든 면에서 항상 옳고 바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영적 침체를 겪기도 하고, 범죄함으로 쓰러지기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상태로 머물거나 그리스도가 주가 되는 일에서 벗어나거나 자신의 마음대로 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영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고린도 교인들이 육신에 속한 자처럼 보이지만 바울의 책망의 말을 듣고 고치며 회개함으로 돌이키게 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123-24절을 보면 [고후 1:23-24]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I call God as my witness-and I stake my life on it-that it was in order to spare you that I did not return to Corinth. Not that we lord it over your faith, but we work with you for your joy, because it is by faith you stand firm. 바울은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 합니다. 또한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믿음에 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첫번째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고린도 교인들의 미성숙함을 책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의 책망을 달게 받았으며, 또한 변화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믿음에 선 것을 통하여 그 또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가르쳐 주는 것은 제 삼 지역인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성경은 그것을 지지하는가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 같다는 것은 아직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성장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이 입니다. 마치 행동이 육신적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듭난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며, 그분께 순종하게 됩니다. 결코 세속적인 생각과 삶의 방식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의 행동이 육신에 속한 자들처럼 시기와 다툼이 있을 수 있지만 여전히 그리스도는 그들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을 위하여 살며,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절대로 세상을 사랑하며, 세상 것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죄 아래 살지 못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비록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로 여길지 모르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버리고 더욱 성숙함에 이르도록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가는 길은 영생에 이르는 안전한 길로 걷게 될 것입니다.

 


주일 말씀 요약 및 설교 영상

주일 말씀 컬럼 안에 설교 영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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