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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2026.04.08 13:34

부활을 통하여 무엇이 입증되는가

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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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영상 https://youtube.com/live/lTLplRe6HdQ


일반적으로 부활절은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는데 초점이 맞추어 집니다. 부활이라는 단어 자체가 내포하고 의미는 죽음에서 살아남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잠을 자고 있다가 깨어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의식이 없다가 깨어나는 것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부활이란 죽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 죽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죽었던 누군가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육체의 죽었다 살아나는 물리적 변화의 상태를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이라는 것이 놀라운 것은 이것은 일반적인 자연 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일이 누군가에게 발생한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부활이라는 단어 자체가 과학과 이성의 범위를 뛰어넘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며 그 놀라운 일이 예수님께 발생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절을 지키며 기념하며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을 생각할 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초점은 죽었다 살아난 객관적 사실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죽으셨다 살아나셨다 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놀라운 일이지만 그것이 부활의 주된 목적이 아닙니다. 그 안에 담겨진 것을 설명하며 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시 사시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단순히 죽으셨으니까 이제 살아야 되는 차원에서 부활 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란 사건은 반드시 증명하고 확인하며 입증해야 될 내용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말해 주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들 입니다.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부활이 왜 필요한 것이며 부활이 주는 감격과 기쁨이 무엇인지 그 영광스러움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1945 8 15일에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였지만 그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고 하루가 지나서야 해방의 기쁨을 만끽한 우리의 선조들과 같은 것입니다. 1945 8 14일에 일본 천왕이 전쟁에서 패배를 인정하며 종전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15일에 대한 민국은 일제의 강점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8 15일에는 아무도 밖으로 나와서 만세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일본 천왕의 항복이 NHK 라디오를 통하여 중계가 되었는데 잡음이 많아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소수의 들었던 사람들도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눈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이 되어서야 광복이 되었다는 사실이 입으로 전해져 거리에 나와 만세를 외치게 된 것입니다. 15일에 광복이 되었는데 알지 못하여 그 기쁨과 감격이 연기된 것입니다.

        부활이 가지는 내용을 모르면 이와 같이 그 기쁨과 감격과 그 영광스러움을 경험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부활이 말하고자 하는 그 중심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12절부터의 모든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정말 중요하지만 오늘은 고린도전서 1517절 한절 말씀만을 집중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17절을 보면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And 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your faith is futile; you are still in your sins.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이라고 말합니다. 한글 성경에는 없지만 원문에 이 구절의 첫 단어는 에이라는 만일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와 그리고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은 실제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은 어떤 일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정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이라는 가정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사셨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떠한 일들이 발생하는가 하는가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만약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그 결과는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지금 말하자 하는 대상은 너희들로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들에게 발생되는 두 가지의 결과는 그들의 믿음이 헛됩니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너희의 그 죄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고린도 교회에 발생되는 일은 그들의 믿음이 헛되며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바울이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은 헛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죄 가운데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디에 연결시키는가 하면 믿음과 연결시키고 죄와 연결시킨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활이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이 아니라 믿음이 쓸모 없이 되는 것이 아닌 믿음 되게 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로마서 4 25절을 봅시다. [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He was delivered over to death for our sins and was raised to life for our justification.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위함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한 부활에 대하여 말하며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5 1절을 보면 [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justified through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그 의로움은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고린도전서 1517절을 보면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And 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your faith is futile; you are still in your sins. 부활이 없으면 믿음이 헛것이 된다는 말은 의롭게 되어지는 것이 없어 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능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일들은 믿음으로 그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되어지는 즉 의롭게 되어지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다시 살지 않았다면 우리가 믿는 것이 없어지며 우리는 의롭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부활은 그들의 죄들에서 벗어나게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이 구절들이 말하는 내용들은 믿음과 죄에 대한 것들만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에 대한 믿음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며 그 죄들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전제하고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믿음과 죄들의 문제는 부활이 증명하고 입증해야 될 내용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부활로 입증된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부활로 증명이 되고 입증되어 지는 것은 네 가지 입니다. 첫 번째로 화목입니다. 로마서 3 25절을 봅시다. [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God presented Christ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the shedding of his blood-to be received by faith.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righteousness,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이 말씀은 깊이 묵상해야 될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 제물이 되셨다고 합니다. 화목제물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달래다 또는 진노를 누그러뜨리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며 진노하신 다는 의미하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하신다는 뜻이며 그 진노의 대상은 죄를 지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죄는 늘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성품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노를 푸시기 위한 수단으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생각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예수님께서는 그 화를 푸시기 위하여 애를 쓰는 모습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예수님을 누가 화목제물로 주셨습니까? 바울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 진노를 자신의 아들 위에 쏟아 부으심으로 그 아들 안에서 당신 스스로가 진노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화목은 인간의 죄로 인한 진노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통하여 증명되어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증명되어지는 것은 구속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9절을 봅시다. [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For you know that it was not with perishable things such as silver or gold that you were redeemed from the empty way of life handed down to you from your ancestors, but with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a lamb without blemish or defect. 베드로는 우리가 대속되었다고 합니다. 대속이란 해방의 값이라는 뜻으로 이 단어는 노예를 매매하거나 해방시켜 주는 일에 있어서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용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속이라는 말의 강조점은 어디에서 사왔느냐는 장소적 개념입니다. 이 단어는 노예의 상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의 상태에서 하나님에 풀려나게 된 것 같이 죄의 노예적 상태에 있었던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사단의 노예로서 살아가던 자들을 해방하여 자신의 자녀되게 하신 것이 놀라운 것이며 감격인 것입니다. 대속이라는 말에서 또 다른 중요한 것은 그 해방의 대가로 지불된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지불된 대가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19절 말씀에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라고 합니다. 레위기 1711절을 보면 [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For the life of a creature is in the blood, and I have given it to you to make atonement for yourselves on the altar; it is the blood that makes atonement for one's life. 피라고 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우리가 대속된 것입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대속에서 마지막 기억해야 할 것은 대속은 값을 지불하여 다시 사신 자에게 종속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자신의 대속하신 분이 주인이 되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칭의 입니다. 화목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는 것에 대한 의미이며 구속이 시장에서 매매를 상징하는 의미라면 칭의란 법정적 용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45절을 봅시다. [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However, to the one who does not work but trusts God who justifies the ungodly, their faith is credited as righteousness. 바울은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칭의에서 생각해야 될 부분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수고에 의해서 의로움은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 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불 경건하며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의롭게 되는 길을 여셨으며 그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16절을 봅시다. [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know that a person is not justified by the works of the law, but by faith in Jesus Christ. So we, too, have put our faith in Christ Jesus that we may be justified by faith in Christ and not by the works of the law, because by the works of the law no one will be justified. 사람의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죄인된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우리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현실입니다. 오직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할 때 인간은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값없이 주어진 이 의로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합니다. 칭의를 이야기 할 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로운 위치를 부여해 주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의롭게 되었다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게 된 선언은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죄가 없다고 선언 하신 것이며 우리의 상태는 여전히 죄인의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칭의란 의로운 성품이나 온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 그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롭게 된 자는 이제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화해입니다. 로마서 5:10-11절을 보겠습니다. [ 5: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For if, while we were God's enemies, we were reconciled to him through the death of his Son, how much more, having been reconciled, shall we be saved through his life! Not only is this so, but we also boast in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we have now received reconciliation.바울이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 되었다고 합니다. 화목이라는 말을 문맥적 의미로 표현하자면 화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화목 즉 화해 되었다는 의미는 수동형으로 우리에게 화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화목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해가 필요합니까? 이유는 우리가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원수란 단어는 혼자서는 성립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그 대상이 필요한데 그 대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사이가 원수가 된다는 것은 그 원수가 되게된 원인 발생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하나님을 버리고 배신하며 배반하고 거역함으로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원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첫 사람 아담의 범죄가 바로 원수가 된 사건입니다. 인간 편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원인 제공자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원수된 관계의 복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수에게 화해를 청한 것이며 화해의 길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 화해를 이루신 하나님께서는 그 화해를 이루시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죽게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이 화해는 말할 수 없는 은혜요 감격인 것입니다. 인간들 사이의 다툼으로 인한 원수 됨에 대하여 먼저 손을 내미는 자가 많지 않음을 압니다. 서로 보지 않고 살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원수로 지냅니다. 먼저 손을 내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며 능력입니다. 여기에 원인 제공자가 먼저 화해를 청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제공자는 가만이 있고 오히려 피해를 본 쪽에서 화해를 청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또한 그 화해를 위한 대가가 생명이라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해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이며 우리의 죄가 없어지게 된 이유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통하여 확증되며 입증된 것입니다. 부활은 그 사실입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이 되시는 화목의 일이,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됨이, 값없이 의롭게 되는 은혜가, 그리고 원수의 관계에서 화해의 자리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으며 부활로 확증된 것입니다. 왜 부활이 영광스러운 것이며 감격스러운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내용이 그 중심에 있기 때문에 부활은 우리에게 한 없이 영광스러운 것이며 주님 오실 때까지 기념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할 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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